[농민칼럼] 봄맞이

  • 입력 2018.03.04 12:13
  • 수정 2018.03.04 12:16
  • 기자명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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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희(제주시 구좌읍)

선봄이 오려나, 느닷없이 큰 비가 오고 태풍처럼 센 바람이 한라산의 깊은 눈마저 녹이더니 겨울의 티끌들을 모두 날려 버렸다.

제주도의 봄은 그렇게 시작하려나 보다.

술 한 잔 하자하면 나는 꼭 제주 막걸리를 먹는다. 그 하얀 막걸리 병에 ‘제주 4.3 70주년’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아니 술병에 4.3이라니. 싸우다 죽거나, 억울하게 죽거나, 뭣도 모르고 죽어간 영혼에게, 숨죽여 살던 제주 사람들에게 술로라도 퍼서 속이라도 달래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움이 더 크다. 70년의 겨울이 지나서 술병에도 쓰여진 4.3과, 막걸리를 먹는 나를 본다.

내 할머니는 식구들을 지키려고 매일 밤 집을 버리고 모래동산을 파고 들어가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단다. 매일 그렇게 지켜 낸 목숨이란다.

할아버지는 ‘폭도’라는 사람에게 죽창에 찔리기도 했지만, 아는 얼굴이면 먹을 거를 싸서 어서 가라고 눈 감았다고 한다. 누구나 들었음직한 무용담은 할아버지가 좋은 사람들 편인지 나쁜 짓한 사람인지 헷갈리게 하지만 그 분들이 나를 있게 한 가족이었다는 것엔 고맙다는 말밖에 뭐라 할 수가 없다. 제주에는 ‘까마귀 제사’란 게 있다. 죽은 자의 옆을 맴돌던 까마귀만 아는 제사다. 같은 날 한동네 이 집 저 집에서 울음소리마저 죽인 제사를 몰래 지내고 있었다. 차츰 알게 됐지. 달달한 열매가 내가 닮은 그 분들의 늙은 눈물 속에서 익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물질해온 소라며 전복을 해녀의 남자가 먼저 먹듯 힘들게 살아남았던 그 분들에게서 뺏어먹는 날들이다. 사랑한다. 보고싶다.

가슴 깊은 곳에서 꺼내본다. 이제라도 4.3항쟁의 발자국을 막걸리 한 병 들고 따라가 볼 일이다. 4년 만에 세워지는 세월호에 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는지 찾아 봐야 한다.

강정해군기지로, 성산에 제주 신공항으로, 거대한 바람개비 풍력사업으로 바다와 들판을 막아선 성벽에서 제주 사람들의 미래를 찾으란다. 돈의 성벽을 쌓고 있다. 제주의 봄도 터를 지키고 가꿔온 사람들 것이 아니고 힘과 돈으로 숨겨진 개발환상으로 밀려나고 있다.

눈 시릴 만큼 파란 바다, 백록담이 지켜보던 산 아래 땅들도 ‘그땐 참 좋았었지’하며 추억으로만 남겨놓을 것인가. 해녀들이, 뱃사람들이 지켜내지 못한 바다. 내가 지키지 않는 터는 누구든 마음대로 해도 되는 바다며 땅이다. 평화가 사라진 군사기지, 시끄럽다고 “비행기 소리만 없으면 살 만하겠다”는 공항 주변 마을, 배려 없이 높게 지어지는 집들, 사람이 먼저인지 차가 먼저인지 다투는 마을. 그런 꼴들이 좋은 거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돈이 들어온다고, 돈 받고 터 내주면 걱정 없이 살지 않겠냐며, 그러지 않고 우리가 할 게 뭐 있냐며 덩달아 춤추는 사람들, 눈앞의 먹을 거에 정신이 팔려 똥인지 된장인지는 그들 머릿속엔 없다.

뒤돌아보지 않고 가는 삶은 버릇처럼 그냥저냥 살게 되는 것이다.

걸어 온 길 앉아 뒤돌아보고 뭘 하며 살아왔는지 누워서라도 곱씹어 볼 일이다.

서툴게 맞이하는 봄.

똑바로 다시 서보자고, 다들 정신 차려 살아보자고, 약속이나 한 듯 많은 것이 바뀌고 있다.

촛불 하나씩 들고 열정으로 모은 힘이 겨울을 이기고 봄이 오게 만들었다.

탈 많고 말 많은 남도의 봄은 이제 제주사람들 몫으로 남아있다.

내 고향을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내 자식에게 돌아올 수 있는 터를 남겨놓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그렇게 살다보면 새롭게 제주에 봄도 오는 거라고 우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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