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성댁의 인생역정

이 사람 ㅣ 경남 밀양시 단장면 여성농민 이남이(71)씨

  • 입력 2018.02.25 21:53
  • 수정 2018.04.22 13:44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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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두부장사집 책임감 강한 맏딸에서 억척스런 새댁으로, 자식들의 행복만을 빌며 고단한 삶을 인내해온 이남이씨. 마을에 송전탑까지 들어서며 역경은 계속됐지만 그의 삶을 지탱해준 가족들이 있어 그래도 행복하다는 그. 이씨의 소박한 웃음이 조금 더 늘어나길 기대해본다.

설을 사흘 앞둔 지난 12일, 이날은 밀양 장날이었다. 상설시장도 있고 대형마트도 있는 어엿한 ‘시’이지만 2일, 7일에는 밀양 시외버스 터미널 주위 길가에 오일장이 선다. 경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설 명절을 앞둔 시골장은 활기가 넘친다. 장거리에 좌판을 펴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 절반은 오일장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하는 분들이고 절반은 밀양 관내에서 손수 키운 농산물을 들고 나온 농민들이다.

시외버스 터미널 주차장 맞은편에 70대 할머니 한 분이 밤을 팔고 있다. 추운 날씨에 두둑한 빨간 점퍼, 그 속에 빨간 조끼를 챙겨 입고 나온 여성농민은 밝은 얼굴로 손님을 맞는다. 직접 농사지은 밤이라며 한 됫박에 6,000원을 받고는 인심 후하게 두어 주먹 더 담아준다.

6,000여평 밤농사를 지어 장날마다 가지고 나와 이렇게 팔고 있다고 한다. 오늘은 특히 설을 앞둔 대목장이라 많이 팔릴 기대로 장에 나왔다.

“우리 집이 여기서 차로 40분 걸려. 그런데 시에서 노인들한테 표를 나눠주거든. 그거 한 장에 3,000원을 내면 택시를 타고 시내까지 나올 수가 있어. 아침에 동네 사람 셋이서 같이 택시타고 나와서 장사를 하는 거야. 잠깐만 기다려. 아들이 와서 봐주기로 했어.”

기자와 약속한 날이 하필 대목장날이라 이남이 씨는 난감해 했지만 아들에게 맡겨놓고 만나기로 했다. 잠시 후 젊은 아들이 어머니를 대신해 장터에 앉았다. 바쁜 대목장날 장사를 방해하는 것이 미안해서 이남이씨를 가까운 식당으로 모셔 점심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책임감 강한 맏딸, 억척 새댁이 되다

“아휴, 내 살아온 이야기 다하려면 며칠을 해도 모자라. 책을 써도 몇 권은 나올 거야.”

식당에 앉자마자 쏟아놓은 첫 마디다.

4남매 중 장녀인 이남이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 심성이 착하고 책임감이 강해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우리 엄마가 두부 장사를 했어. 두부를 하려면 개울에서 물을 스무 동이는 이고 와야 했지. 4살 때부터 두부자루 붙잡아 주며 엄마를 도와야 했어. 콩물 끓이고 두부 짜고 하는데 내가 없으면 새끼를 붙들어 매고 해야 하니 엄마를 안 도울 수가 있나. 우리 엄마 죽으면 못 산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국민학교 1학년 다니다 그만 뒀어. 동생은 그래도 울면서 학교에 갔어. 오빠도 공부 잘해서 국민학교 졸업하고 부산에 가서 야간고등학교 나와서 경찰이 됐지.”

오빠와 동생들은 어려운 가운데에도 공부를 놓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 이남이는 맏딸의 책임감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엄마를 돕지 않으면 엄마가 그만큼 더 고생을 할 거란 속 깊은 생각이 있어서였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일만 하면서 자라 19살에 시집을 가게 됐다. 같은 밀양이지만 30분을 걸어 버스를 타고 와서는 또 한참을 걸어서 낯선 시댁에 도착했다고 기억했다.

“어른들이 선을 보고 와서는 그 집에 가면 마당에 우물이 있어서 물동이 일 필요 없겠다고, 신랑한테 글도 배우고 편케 살라고 하면서 보냈어.”

그러나 막상 시집와서 보니까 신랑은 2대 독자로 귀하게 커서 일이라곤 할 줄 몰랐다. 사람은 마냥 좋아서, 어울려 술 마시고 노름하는 게 하루의 전부일 정도였다. 새색시는 부끄러워서 신랑한테 글을 배우기는커녕 밥도 같이 못 먹고 부엌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결혼 첫 해 겨울 초가지붕에 올릴 이엉을 엮는데 동네 할아버지 여러 명을 놉 얻어서 1주일이나 일을 하는데 아까운 생각만 들더라고. 돈 들어가지 중참 해 줘야지. 그래서 다음해에는 시어머니한테 놉 얻지 말자고 했어. 내가 이엉을 엮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려서부터 친정아버지가 하는 걸 보고 커서 할 수 있을 거 같더라구. 시집 와서 한복 입고 다녔는데 아침 해 먹고 설거지 해 놓고는 몸빼로 갈아입고 이엉을 엮었어. 하루에 6둥치씩 엮겠더라고. 그런데 지붕 꼭대기에 올리는 용바람(용구쇠) 그건 못해서 큰집 시숙한테 부탁해서 얹었어. 그때부터 매년 이엉을 엮었는데 박정희가 초가집 없애고 슬레이트 올리면서 안하게 됐지.”

갓 시집 온 새댁의 억척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편은 일을 할 줄 모를 뿐더러 일하는 것을 싫어했다. 일하러 가자하면 대문 앞에 나섰다가도 좀 쉬다 간다고 방에 들어가 누워 버리기 일쑤였다.

“우리 남편 인물도 좋고, 키도 크고, 필체도 아주 좋았어. 노래도 잘하고 촌에서 사람 좋기로 두 번째라면 서운할 정도였지. 손씨 양반집이라고 일은 잘 안하려 했어. 그러니 내가 애가 말랐어.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

아이들을 낳으면서 ‘어머니’로서 책임감은 더욱 커졌다. 봄이 되면 더덕이나 산나물을 뜯어다 표충사에 가서 관광객에게 팔아 살림에 보태고 논농사 밭농사 혼자 다 해야 했다. 남편이 34살에 경운기를 샀는데 매일 술을 먹고 운전해 사고 나기 일쑤였다.

“우리 마당이 넓었어. 처음에는 마당에서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면서 경운기 운전을 배웠지. 경운기를 끌고 다니며 일을 하니까 훨씬 수월했어. 그래서 그때부터 경운기 직접 끌고 다니면서 농사를 지었어.”

1980년대 중반 30대 중반의 여성농민이 경운기를 운전하며 농사를 지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식들이 커가면서 이렇게 해서는 아이들 학교도 못 보내겠다 싶어서 부산으로 장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소죽 끓이고 아침 해 놓고 7시에 대추를 한 자루 이고 나가서 버스 타고 밀양역에 가서 완행열차 타고 부산에 가면 9시야. 동래나 자갈치 시장에 도착하면 10시, 거기서 장사를 하는 거지. 집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대추자루를 몇 번을 이고 내리고 해야 하는지 몰라. 그래도 대추 한 자루 팔면 꽤 많이 남았어. 그리고 밀양에서 부산까지 완행열차 요금이 1,500원이라 차비가 싸니까 할만 했지.”

이렇게 장사를 하는 와중에 남편은 간경화가 왔다. 부산 병원에 입원시켜 놓고 장사를 마치고 병원에 들렀다가 저녁에 서둘러 밀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계속했다. 이남이씨가 부산을 오가면서 하던 대추장사는 밀양에서 부산행 완행열차가 없어지며 기차요금이 올라 그만두게 됐다.

“술을 너무 좋아하니까 간경화가 온 거야. 병원에 한 달 입원치료를 받아 좋아져서 퇴원하면 얼마 안 되서 또 술 먹고 그럼 또 병원에 가게 되고 이런 생활이 반복되었지. 그러다가 47살에 세상 떠났어.”

젊은 남편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이남이씨에게는 전환점이기도 했다.

“남편은 법 없이도 살만큼 착한 사람이지만 술 때문에 속을 많이 썩다가 일찍 돌아가셨어. 남편이 떠나고 나서부터 사는 게 조금씩 나아졌지. 헛돈 나가는 게 없으니까.”

억척같은 생활에 이때부터 땅을 마련하게 됐다. “그 때는 남의 송아지를 키워서 새끼를 낳으면 그걸 나눠 갖는 게 있었어. 그렇게 해서 소를 2마리까지 늘리고 보리 매상도 합치고 빚도 좀 내서 평당 3,100원씩 주고 논 700평을 샀어.” 물려받은 논 700평, 산 6,000평에 700평을 더 장만했다. 이후에 대추밭 500평을 더 마련했다.

혼자 논밭 농사짓고 부산으로 대추를 팔러 다니고, 돈이 될 만한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어느 때에는 빈병을 모아 목돈을 만지기도 했다.

“소주 대병, 정종병을 모아 달라는 거야. 그래서 인근 동네를 다 돌아다니면서 빈병을 모아서 동네마다 아는 집에 쌓아 놓고 또 모으고를 계속 했어. 그때는 집집마다 빈병 1~20개씩은 다 있었거든. 하나에 20원씩 주고 사면 50원에 사갔어. 동네마다 태산처럼 모은 빈병을 큰 차를 불러 한 번에 실어냈지.”

억척스럽게 살다보니 생활이 조금씩 나아졌다. 자식들도 커가면서 엄마의 농사일을 도와 힘을 보탰고, 스스로 공부를 하며 자기 삶을 개척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아들이 경운기 사고를 당했다.

“큰 아들이 고3, 작은 아들 고2 때야. 밀양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집에 일한다고 왔어. 일요일에는 잔치가 있어서 토요일날 일을 더 하겠다고 금요일 밤에 경운기를 끌고 기름을 사러 간 거야. 그때는 주유소가 아주 먼 데 있었어. 작은 아들이 경운기를 끌고 내가 뒤에 타고 가는데 화물차가 와서 받는 사고가 났어. 나는 논 한가운데 가서 떨어지고 아들은 언덕 아래 널브러지고 병원에 실려 가서 나는 20일 만에 깨어났는데 아들은 한 달이 지나도 깨어나지 못했어. 머리를 크게 다쳐서 뇌수술하고 목을 뚫어 호스를 꽂고, 어깨에 쇠 박고, 다리가 비틀어지고, 골반 뼈가 부러지고…, 아주 심각했지. 나도 많이 다쳐서 잘 걷지도 못했는데 기어다니다시피 하면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 보러 다녔어. 중환자실에서 두 달 만에 깨어났어.”

작은아들은 이 사고로 크게 다쳐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가해자는 보험도 들지 않아서 치료비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래도 젊은이가 안 되서 나중에 돈 벌어서 갚으라 하고 풀어줬다고 한다.

“지금도 아들은 교통사고 후유증이 조금 남아있어. 아들 일 시켜 먹으려다 그렇게 됐다는 생각에 항상 가슴이 아파. 지금 같이 농사짓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고단한 삶속 작은 보람, 송전탑에 위태

이남이 씨의 삶은 고단하고 힘겹지만 고생한 만큼 보람을 일궈 가고 있었다. 땅도 늘리고 집도 짓고 장성한 딸 시집도 보냈다. 큰아들은 자기 힘으로 공부해서 소방공무원이 됐다. 작은 아들은 사고로 오래 고생을 했지만 결혼도 하고 고향에서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며 아들딸 낳고 잘 살고 있다. 이제 큰 걱정 없이 살만해졌다.

그런데 2000년 무렵에 돌연 한전에서 송전탑을 세운다는 발표가 나오면서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765KV의 전기가 흐르는 고압 송전선이 동네를 가로질러 지나간다는 것이다. 송전선은 이남이씨가 피땀으로 장만한 대추밭을 가로지른다.

“그게 지나가면 땅값도 떨어지고 농사도 안 되고 사람들 암도 생긴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할머니들이 쇠줄로 엮어서 공사 못한다고 막아서다가 한전 직원 장갑에 이가 걸려서 빠질 정도로 싸웠어. 그때가 10월인데 맨바닥에 비닐 한 장 깔고 잠을 자면서 농성을 했어. 20일 노숙하다가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성금을 내서 천막을 사서 치고. 포크레인에 쇠사슬을 묶고 경찰과 밀고 당기고 하며 싸우고 서울도 엄청 다녔어. 문재인 대통령이 원전 폐지한다고 해서 여기서도 찍어주자고 했는데 당선되고는 딴소리하고 있잖아. 이제 철탑 세워지고 보상 받으라 하는데 난 안 받았어.”

공공의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밀양 산골 농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재산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지만 농민들의 저항은 거대한 공권력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가장 전기를 적게 쓰는 이남이씨는 자신과 전혀 무관한 765KV 전기가 대추밭으로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지금 이남이 씨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송전탑 싸움을 하면서부터 입고 다니던 ‘765KV OUT’라고 쓰인 빨간색 조끼를 입고 다니는 것이 전부 일지도 모른다. 대목장에 밤을 팔러 온 오늘도 이남이씨는 그 빨간색 조끼를 입고 나왔다.

“지금? 행복하지. 작년에 큰아들이 김해에서 칠순 찬치를 차려줬는데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 손녀 모두 모이니까 너무 든든했어. 영감이 키가 크고 인물이 좋아서 손주들도 전부 키가 커. 내 동생이 와서 누나 식구가 이렇게 많으냐고 하더라고….”

이남이씨의 인생역정은 그 연배의 어머니들에겐 그리 특별한 사례가 아니기에, 대목장날 좌판을 지키는 어머니들의 웃음이 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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