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6.15와 민족공조

  • 입력 2018.02.25 02:30
  • 수정 2018.02.25 02:50
  • 기자명 이대종(전북 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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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종(전북 고창)

“다 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대략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가 있다.

쌀이 모자랐을까?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기 보리밥을 예찬하던 노래다.

흰쌀밥만 먹지 않는지 도시락을 검사하고, 매주 한 번은 분식의 날이라 하여 빵을 싸오게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쌀이 남아돌아 골칫거리라 하니 다 옛말이 됐다.

그런데 이것도 속을 들여다보면 속셈은 따로 있었다. 저임금을 구조적으로 떠받치기 위한 저곡가 정책,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쌀 소비량을 낮춰 쌀값을 잡아야 했다. 다른 한편 미국에서 들여오는 밀가루를 대량으로 소비할 대책이 필요했다. 일거양득이라 할 이 정책(혼분식 장려운동)은 강제적으로 시행됐다. 설렁탕에 곁들여 나오는 국수가닥, 쌀밥만 먹어서 조선왕조가 망했다느니 하는 헛소리 등은 이 시절이 남긴 잔재다.

오늘날 쌀 소비량 감소로 표현되는 우리네 식생활의 변화는 박정희 시대 강제적으로 시행된 혼분식 장려운동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할 것이다. 혹자는 이 때문에 우리 쌀이 남아돌게 됐다고 강변한다. 하지만 잘못된 말이다. 문제의 근원은 수입쌀에 있다. 그 옛날 미국산 밀가루가 우리밀을 몰살시킨 것처럼 오늘날 미국산 수입쌀이 우리쌀을 서서히 고사시키고 있다.

사실은 복남이 얘기를 하려던 것인데 한참 곁가지로 새버렸다.

복남이는 금강산에서 만난 북측 안내원이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금강산을 자주 가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 안면을 트고 다시 만나고, 그러고 나서는 갈 때마다 서로를 찾아 꼭 만나게 됐다. 그러다 보니 금강산 하면 복남이, 복남이 하면 동네 한바퀴가 떠오른다. 그는 나를 형님이라 불렀고 나는 그를 동생이라 불렀다. 꼭 한번은 ‘동무’라 불러주고 싶었는데 한사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측 손님들한테 별의별 해괴한 질문을 다 받아 괴로울 때가 많다고 하소연하던 복남이가 문득 그립다. 만날 때마다 집으로 모셔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더랬다. 그러던 것이 1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가버렸으니 지난 세월이 허망하기 짝이 없다.

언젠가 그가 나에게 작은 책자를 주려 했다. <6.15와 민족공조>, 사양하고 받지 않았지만 그 제목만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복남이가 나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 마음을 곰곰이 되새겨본다. 6.15와 민족공조, 민족공조, 민족공조….

지난 1월 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과 북은 남북선언들을 존중하며, 남북관계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우리 민족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합의했다. 이 합의를 보며 나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 그 책자를 떠올렸다.

나는 오늘 복남이가 살고 있는 고성으로 간다. 같은 고성 땅이지만 우리 사이에는 분단선이 가로놓여 있다. 하지만 서로를 향해 움터 오르는 새로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민족공조의 기운이다. 민족공조의 기운이 더없이 확산되고 확고한 믿음과 신념으로, 당국 간 상호신뢰와 정책으로 정착된다면 그 힘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 힘 앞에 우리 사이의 분단선은 힘없이 녹아내릴 것이고 막혔던 혈맥이 뚫려 통일로 거침없이 달려가게 될 것이다.

‘전국 농민 통일문화제’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한다. 그 길에 함께 하는 농민으로서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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