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협궤열차① “기차 이놈, 게 섰거라!”

  • 입력 2018.02.09 10:29
  • 수정 2018.02.09 10:3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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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에 기차가 멈춘 지 십여 분이나 지났다. 차장이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더니 호루라기를 불며, 꾸역꾸역 모여드는 승객들을 재촉한다.

이상락 소설가

“빨리빨리들 타요! 기차 출발할 시각이 5분이나 지났어요! 이봐요, 거기 쌀장수 아줌마, 그 쌀자루는 실을 거요, 말 거요!”

“차장 아저씨, 재촉만 말고 이 쌀 자루 싣는 것 좀 거들어 줘!”

“에이, 기관사는 빨리 가자고 빵빵거리고 난린데….”

하는 수 없이 차장이 내려서 쌀자루 두 개를 거들어 싣는다. 그때 한 할머니가 풋것들을 한 다발 꾸려 이고는 종종걸음으로 달려온다,

“아이고 할머니는 웬 풋나무단을 기차에 실으려고요?”

“차장 눈에는 이것이 풋나무단으로 뵈남? ‘반짝시장’에 내다 팔려고 밭에서 콩을 좀 뽑았어.”

차장이 할머니의 콩다발을 받아 들더니, 한쪽을 땅바닥에 부딪쳐 뿌리에 묻은 흙을 대충 털고 나서 객차에 싣는다. 드디어 기적이 두어 번 울리고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저만치에서 한 노인이 지팡이를 휘저으며 “이놈, 게 섰거라!”를 외치며 다가온다. 결국 기관사가 기차를 멈춘다.

“차장, 뭣 하고 있어. 빨리 내려서 저 할아버지 부축해서 태워드리지 않고!”

차장이 다시 내려서 노인을 부축하여 객차에 태운다. 자리 하나를 양보 받은 노인이 숨을 고르더니 기차 시각에 늦은 연유를 변명한다.

“오늘 인천 약방에 가는 날이거든. 아, 평상시에는 하늘의 해가 우리 동네 느티나무 위로 이렇게 반 뼘쯤이나 됐을 때 집에서 나오면 시간이 딱 맞았는데 오늘은….”

“오늘은 구름이 끼어서 이제나 저제나 해 나올 때만 기다리다가 늦으셨구먼요, 할아버지?”

쌀장수 아낙이 큰소리로 그렇게 받는 바람에 승객들 모두가 폭소를 터트린다. 칙칙폭폭 칙칙폭폭…기차가 그야말로 고전적인 소리를 뿜으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이런 기차가 정말 있느냐고? 지금은 없지만 옛날엔 있었다. 일제 강점기이던 1937년에 개통되었다가, 23년 전인 1995년에 기적소리를 멈추고 사라졌던 ‘수인선 협궤열차’가 그것이다. 협궤(狹軌)열차, 보통의 열차보다 폭이 좁은 레일 위를 달린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반열차의 레일 간격이 1,425밀리미터인데 반하여 협궤열차의 레일은 그 폭이 762밀리미터에 불과했다. 레일 폭이 76센티미터라면 군대에서 제식훈련 할 때 배운, 한 번 내딛는 ‘큰 걸음’의 보폭에 지나지 않는다. 그 좁은 레일 위를 달리자니, 열차의 차체도 그 만큼 작을 수밖에 없었다. 객차가 달랑 두 량(輛)이었다. 그 때문에 이용자들 사이에서는 ‘꼬마열차'라고 불렸다.

“요즘으로 치면 마을버스나 한가지예요. 기차가 산모퉁이 돌아갈 때 손짓을 하면 멈춰서 태워주기도 하고…. 그래서 기관사도 차장도 승객도 모두 다 가족 같았다니까요.”

1970년대 초반, 협궤열차를 타고 수원과 인천 사이를 왕래하며 쌀장사를 했던 할머니의 얘기다. 25년 동안 수인선 협궤열차를 운행했던 퇴역 기관사 박수광씨가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는, 그야말로 수인선 협궤열차의 ㄱ부터 ㅎ까지를 탐색하는 데에 더 할 나위가 없다.

“한 번은, 군자역에서 탔던 할머니가 야목역에서 내리겠다고 하시는데, 객차에서 내리려다 말고는, 차장한테 당신의 신발을 내놓으라고 마구 호통을 치는 거예요. 알고 보니 기차를 처음 타시는 분이라, 바닥에다 신발을 곱게 벗어놓고서 버선발로 객차에 올랐던 것이지요.”

배를 타고 가다 물속에 칼을 빠뜨리자, 나중에 찾겠다며 칼 빠진 자리를 뱃전에다 표시를 해두었다는 데에서 비롯된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수인선 협궤열차 판 일화다.

수원에서 남인천까지 해안지역을 따라 52킬로미터 길이로 뻗어있던 수인선 협궤열차는 다른 교통수단이 전무했던 시절, 지역 주민들의 유일한 이동수단이자 생계수단이기도 했다. 이제부터 그 꼬마 열차를 타고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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