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을’, 임차농

  • 입력 2018.01.21 11:23
  • 수정 2018.01.21 18:42
  • 기자명 장수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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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장수지 기자]

가지치기가 한창이어야 할 과수원 곳곳엔 압류 팻말이 꽂혀 있었다. 과수원을 임대해 친환경으로 농사를 짓던 한연수씨는 자신도 모르게 진행된 땅 매매 계약에 의해 사과나무를 모두 뽑아야 할 처지에 놓였다. 2년 전 종이봉투로 감싸지 못한 사과를 보며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한씨(위 사진)의 사정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 사이 법원은 채권자(땅주인)와 채무자(한씨) 사이의 법적 분쟁에 따라 과수원에 심겨진 나무를 모두 압류했다. 한씨의 과수원을 다시 찾은 지난 15일 그는 자신의 땀과 노력이 스며있는 곳을 떠나 남의 과수원에서 가지치기를 했다. 얻은 건 지친 몸과 품삯뿐이었다. 한승호 기자

본지는 지난 2016년 ‘21세기판 소작농’이라는 제목으로 농지 임대차의 문제점을 한 차례 짚은 바 있다. 당시 소개됐던 한연수(58)씨는 2007년 충북 단양군 대강면에 위치한 8,496㎡(약 2,570평)의 농지를 임차했다. 임대차 계약을 살펴보면 한씨는 다랑이 논인 토지를 직접 개간하는 조건 하에 12년 동안 무상으로, 이후 8년은 주변 지가를 반영해 임차료를 납부하기로 명시돼 있다.

한씨는 유기 사과를 재배하기 위해 약 10년 동안 토양을 만드는 등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고 마침내 2014년 12월 무농약 인증을 받았다. 예정대로라면 2017년 12월부터는 유기농 인증을 받은 사과를 수확·판매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토지 임대 8년차인 2014년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임대인 A씨는 토지의 일부(2,815㎡)를 이웃 B씨에게 매매했고, B씨는 한씨에게 해당 토지의 사과나무를 모두 캐내라고 독촉했다. 한씨는 임대차 계약에 ‘임대인은 토지를 매매할 경우 임차인의 동의를 구한다’는 내용을 담은 만큼 A씨의 일방적인 토지 매매로 인한 B씨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임대인 A씨는 2019년부터 지급하기로 약정된 임대료를 2015년부터 받아야겠다며 계약 변경을 요구했다. A씨는 한씨를 상대로 재계약서를 제시하며 임대 토지 주변의 시세를 고려해 평당 2,000원의 임대료를 받아야겠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씨는 새로운 계약서에 임차인을 보호할 조항이 전혀 없고, A씨가 주장하는 주변 과원의 임대료 시세는 해당 지역에서 한창 본 수확을 보는 성목 사과밭을 임대한 경우라며 불응했다.

한씨와 임대인 A씨의 재계약은 불발됐고, B씨는 사과나무를 뽑으라며 거듭 한씨를 압박했다. 한씨는 A씨의 일방적인 매매로 인한 B씨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고, 계약서에 ‘토지 매매시 임차인의 동의를 구한다’는 조항이 존재한 만큼 사건으로 인한 정신적·물질적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A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한씨는 1차 판결에 패소했고 이에 항소했지만, 2심까지 패하고 말았다. 한씨는 A씨의 변호사 선임비용 등 약 611만원의 소송비용액을 상환해야한다. 한씨는 억울함에 소송비용액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A씨는 한씨의 사과나무를 경매에 붙였고 과원은 압류돼 현재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씨는 10년 동안 시간과 노력을 쏟은 과수원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생계유지를 위해 다른 과수원의 가지치기 일을 하고 있지만, 한씨가 겪은 정신적·물질적 충격은 너무도 컸다.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한씨뿐만 아니라 오늘날 법 테두리 내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임차농민의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임대차 계약서를 서면으로 작성했음에도 임차인은 임대인이 나가라면 나가야 하고, 임대료를 더 내라면 더 내야한다.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 아직도 농촌 곳곳에선 말도 안 되는 임대차 계약과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농민이 실재한다. 이에 임차농도 제도 속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관련 내용을 담은 헌법과 농지법의 개정을 다시 한 번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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