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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농사짓고 살기로 했을까”이 사람ㅣ여주의 벼농사꾼 박재홍씨

[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어릴 때 어머니께서는 밭이란 밭에는 모두 땅콩과 참깨를 심었어요. 콩을 심기도 하고, 논농사를 하면서도 몇 천 평씩 밭농사를 했지요. 여기 여주사람들은 다 그랬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땅콩 농사, 참깨 농사, 콩 농사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그게 다 수입농산물 땜에 그렇게 된 거죠. 그게 아마 유알(UR) 이후일 거예요. 그러면서 벼농사를 주로 하게 됐어요.”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농민 박재홍씨의 이야기이다.

여주 땅콩은 지금도 이름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수입개방의 파고는 여주의 땅콩과 참깨농사에 직격탄이 됐다. 서서히 땅콩농사와 참깨농사가 줄어들고 그 자리에 고구마가 심겨졌다. 허나 고구마 농사도 오래가지 못했다. 한때 고구마 농사지어서 땅도 사고했다는 데 그것도 이제 옛이야기다.

“2~30년 전에는 논농사만 해도 괜찮았어요. 그땐 정미소가 2개리에 하나씩은 있었거든요. 그리고 쌀장사도 있었고, 정미소에서 쌀을 다 팔아줬어요. 타작을 해서 정미소에 갖다 주면 한두 달 후에 쌀값을 받았죠. 겨울에 방아를 안 찧고 쌓아두었다 봄에 방아 찧어 팔면 값을 더 받았어요. 그때는 단경기라는 것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부수매가 없어지면서부터 쌀값이 더 나빠지게 됐어요. 수매를 할 때는 정부 수매가가 결정되면 그게 기준이 되서 농협 수매가도 정해졌는데, 정부수매가 없어지고 나서는 농협이 자체적으로 가격을 결정하면서 쌀값이 전반적으로 낮아졌어요. 농협에 큰 RPC(미곡종합처리장)가 생기면서 동네 정미소는 하나둘씩 문을 닫고 지금은 모두 없어졌잖아요. 이제 쌀을 농협 말고는 팔 곳이 없어진 거죠. 농민들이 더 불리해졌어요.”

1995년 쌀 개방이 시작되면서 정부주도 하의 양곡정책은 서서히 농협 중심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05년 쌀 재협상 이후 양정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추곡수매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4년 마지막 추곡수매 당시 수매가는 조곡 40kg에 6만440원이었다. 이후 10여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이 가격을 상회한 적이 없다.

“옛날에는 1만평 농사만 지어도 살만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5만평 농사에도 살기가 어려워서 자꾸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소득도 소득이지만 사는데 너무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요즘엔 내가 왜 농사를 지어왔나 하고 후회가 돼요.”

경기도 여주에서 벼농사를 짓는 박재홍씨가 지난해 수확한 쌀이 담긴 톤백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박씨는 농사 규모를 늘려도 소득은 감소하는 현실 앞에서 “왜 농사짓고 살까”라며 반문하기도 했다.

농사만 지어 먹고 살기 어려운 세상

박씨는 어려서부터 농사를 지어온 진짜 농사꾼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는 봄, 가을에 2주씩 학교를 안 갔어요. 농사일을 하느라…. 학교에서는 으레 그러려니 했을 정도예요. 봄 못자리 할 때랑 가을 벼 벨 때 농촌형 방학을 가진 거죠.”

그는 원래 여주 사람이 아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라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혼자된 어머니는 서울살이가 쉽지 않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여주로 내려왔다. 여주에 와서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터전을 일궈 나갔다. 이때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다.

“당시 농촌 아이들이 다 그렇듯 농사일을 놀이처럼 했죠. 초등학생 때부터 경운기를 끌고 다녔고, 중학생 돼선 경운기로 논밭을 갈았어요.”

10대 초반부터 어머니를 도와 시작한 농사일, 학교 갔다 오면 논밭으로 가 농사일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중학교가 산길로 4킬로 정도 되는데 밭이 학교 가는 중간에 있었어요. 아침에 학교에 갈 때 경운기에 일할 연장과 점심거리를 싣고 어머니를 태우고 밭까지 가서 학교에 걸어가고, 끝나면 밭으로 걸어와서 경운기로 집에 오고 그런 게 대부분의 생활이었어요.”

불우한 가정형편이지만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그 또래에 흔히 있을 만한 일탈행동도 없이 성장했다.

“동네 사람들이 특이하게 생각했죠. 어머니는 억척스럽고, 어린 아들은 농사일에 매달리고…. 어른들한테 고생한다, 착하다 그런 소리 참 많이 들었죠. 나중에 커서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독이 된 거 같아요. 자랄 때에는 친구들끼리 나쁜 짓도 하면서 크는 건데, 착한 애라 규정이 돼서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온 거 같아요. 전혀 일탈을 하지 않은 것 아니지만 드러나지 않게 몰래 했던 거 같아요. 이중적으로 살았다고 할까요. 성격도 그래서 속에 있는 걸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한편으론 이때 형성된 심성이 오늘까지 박씨를 이곳에서 무던히 농사를 짓게 하는지 모른다.

“그때는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어머니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고등학교 때 경운기를 끌고 가다가 도랑에 빠진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내 걱정은 안하고 ‘경운기 고장 안 났냐?’ 그것부터 물어 보셨어요. 그래서 제가 막 뭐라고 했죠. 아들보다 경운기가 더 중하냐고. 하하.”

그때는 어쩌면 경운기가 더 중하던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다친 곳이 낫지만 경운기는 고장이 나면 당장 일을 할 수 없고 돈이 들어가니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땐 열심히 하면 벼농사만 해도 살만했어요. 그러니까 1990년대까지는 좋았어요. 소도 한두 마리씩 키우고, 2~3년 키워 팔면 논 몇 마지기씩 사고 그랬거든요. 빚만 없으면 살만 했어요.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농사가 좋아졌어요. 어머니는 농사밖에 없다고 어려서부터 농사지으라고 하셨어요.”

유년시절부터 시작한 농사는 청소년기를 거쳐 자연스럽게 직업이 됐다. 어머니의 억척 덕에 농지는 1만여 평이 넘었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성공한 농민이다. 아무것도 없이 여주에 내려와 10여년 농사를 지어 자작농으로 기반을 마련했으니.

농사규모는 늘고 소득은 줄고

그는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마치면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었다.

“대학을 마치고는 6~7년간 논농사만 했어요.” 농사는 순탄했다. 어려서부터 하던 농사이고 어머니가 마련한 기반도 있고 쌀값도 괜찮았다. 그런데 그런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5년 추곡수매가 폐지되고 쌀값이 하락하면서 박씨의 농사는 전환기를 맞게 됐다.

“정부수매가 없어지면서 쌀값이 떨어지니까 농사 규모를 늘려야만 이전만큼 소득이 채워졌어요. 주위에 나오는 논도 많았어요. 농사규모가 늘어나면서 가장 큰 일이 못자리 하는 건데 그때 정부에서 ‘공동육묘장’ 보조 사업이 있었거든요. 보조 받고 자부담 조금하고 해서 하우스를 지었는데 정부 계산대로하면 여기서 키운 모판이면 내 농사 다 하고도 남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죠. 모가 햇빛을 봐야 하는데 설계가 잘못됐어요. 탁상행정이죠. 그래서 하우스를 더 지을 수밖에 없었고. 비닐하우스 그거 도시사람들 보기에 우스운 것 같아도 제대로 지으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조립식 건물 짓는 만큼 들죠. 몇 천만 원씩 투자되니까 처음에는 내꺼만 키워서 편히 농사짓자고 시작한 게 투자금이 많이 들어가 모판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되고, 모 심고 나서 하우스를 비워 놓을 수 없으니까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게 됐어요.”

이렇게 시작된 하우스 농사는 박씨에게 질곡으로 다가왔다. 일은 몇 갑절 많아졌지만 소득이 늘기는커녕 빚만 늘어가는 형국이었다. 이는 비단 박씨 개인만이 겪는 일이 아니었다. 농업개방 이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현상의 일단일 뿐이다.

“하우스에 오이도 하고 상추도 하고 처음 못자리 하우스 2동으로 시작했는데 부족해서 5동을 더 짓고, 하우스 농사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늘려서 30동까지 늘렸어요. 외국인 노동자 2명을 고용해서 농사를 지었는데,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직원은 6시 정각에 퇴근하면, 샤워하고 산책하는데 주인인 나는 해질 때까지 하우스에서 일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10년을 했는데 빚에 치여서 결국 농어촌공사에 경영회생지원사업으로 땅 팔아 빚 갚고 하우스 농사 접었어요.”

농산물 개방 시대를 맞아 정부는 규모화, 시설화, 기계화를 외치며 농업구조개선(조정)을 시작했다. 농사를 계속 짓기 위해서는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박씨도 농사면적을 늘려 규모화하고 시설을 들여 하우스 농사로 농사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그렇게 10년을 고생했으나 결과는 땅을 팔아 빚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시절 대다수 농민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경영회생지원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에 농지를 팔고 7년간 임차해서 농사를 짓고, 다시 농지를 살 수 있는 제도다. 그런데 7년이 지난 지금 박씨는 그 논을 다시 살 형편이 아니다. 임차기간을 3년 더 연장을 할 수 있지만 3년 후에도 결국 땅을 되사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했다.

“경기미 특히 여주, 이천 쌀은 가격이 비싸고 유명하니까 다른데 보다 쌀값이 비싸지 않냐 하는데 비싼 건 사실인데 남부지방 보다 소득이 작아요. 우선 여기는 1모작 밖에 못하고 수확량 자체가 달라요. 여주의 경우 보통 3배출이고 잘해야 4배출이 나요. 변동직불금 계산할 때 1ha에 쌀 61가마 나오는 것으로 계산하는데, 경기도 지역은 평균 3.5배출 나온다고 하면 1ha에 52.5가마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소득이 더 낮을 수밖에 없죠. 농사를 못 지어서가 아녜요. 토질과 기후가 그렇고, 또한 고품질로 가면서 다수확품종을 심지 못하는 이유도 있죠.”

경기도 지역은 쌀값이 상대적으로 비싼 곳이다. 특히 이곳 여주 쌀은 진상미로 이름이 높은 곳이라 비싼 가격에 팔려나가고 있다. 그래서 남부 평야지대보다 소득이 높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박씨의 설명이다.

“그나마 저는 친환경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학교급식에 납품을 해서 남들보다 더 비싸게 팔고 판로도 안정적이지만 그래도 힘들어요. 돈도 문제이지만 일이 점점 더 많아지니까 삶의 질이 너무 안 좋아져요. 하우스 농사 그만두고 표고농사를 시작했는데 그것도 중국산 표고 때문에 가격이 좋지 않거든요. 봄이 되니까 고민이 많아요. 표고농사는 봄, 가을이 최고 수확기인데 모내기하고 표고 수확 철이 겹쳐요. 표고를 더 늘려서 사람을 두고 해야 할지 조금만 해야 할지 고민이죠.”

육묘장 한쪽에 있는 창고에 마련된 간이 배양실에서는 종균접종을 한 표고 배지가 배양되고 있다. 비용을 최대한 줄이려는 듯 배지를 올려놓은 선반은 못자리 육묘용 선반을 이용하고 있다.

새해를 맞으며 박씨는 희망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농민 박씨의 모습은 개인 박재홍이 아닌 개방농정의 한복판에 서 있는 우리 농민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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