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자, 경자유전의 원칙이 있는가

  • 입력 2018.01.19 11:48
  • 수정 2018.01.19 11:49
  • 기자명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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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승호 기자]

기자와 마주앉은 농민의 얼굴은 검붉게 그을려 있었다. 고된 노동과 누적된 피로에 찾아온 감기 탓에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는 지쳐있었다. 농민은 사과 과수원에서 가지치기 작업을 마무리하고 왔다고 했다. 다만, 작업 현장은 자신의 과수원이 아니었다.

그가 품삯을 받으며 남의 과수원에서 한창 가지치기를 할 때, 기자는 그가 땅주인으로부터 임차해 농사지어왔던 과수원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거듭된 한파에 녹지 않은 눈이 질퍽하게 쌓여 있던 과수원의 사과나무는 흉물처럼 방치돼 있었다. 농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 오랜 시간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쌓인 눈 위로 서 있는 나무와 잡초는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을씨년스러운 풍경의 과수원을 배경으로 팻말이 군데군데 서 있었다. 채권자(땅주인)와 채무자(임차농) 사이의 법적 분쟁에 따른 법원의 압류 소식을 알리는 팻말이었다. 친환경농사를 짓기 위해 농민은 장기간 땅주인으로부터 과수원을 임차했다. 땅주인은 임대해준 땅의 일부를 임차농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제3자에게 팔았고 이후에 사과나무를 뽑으라고 통보했다.

오랜 시간 친환경농사를 짓기 위해 들인 품과 노력, 결실을 맺기 시작한 나무를 눈앞에 두고 농민은 버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법정 소송에까지 이르렀고 해당 과수원에 심겨진 나무들은 모두 압류됐다. 농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뽑힐 처지에 놓인 것이다.

묻자. 대한민국에 경자유전의 원칙이 있는가. 위의 사례를 지극히 예외적인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논농사, 밭농사를 지어 그나마 받을 수 있는 직불금을 실경작자가 아닌 땅주인에게 내어주고, 이를 마다할 시 임차한 땅마저 주변의 김씨, 이씨, 박씨 등 서로 알고 지내온 다른 농민에게 빼앗기는 잔인한 현실이 대한민국 농업의 현주소다.

대한민국 헌법 제121조는 이렇다. ①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 ② 농업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생하는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

다시 묻자. 우리나라에 경자유전의 원칙이 살아있는가. 위 사례에 언급된 농민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임차농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애써달라며 쉰 목소리로 거듭 부탁했다. 헌법의 경자유전 원칙이 사문화되지 않을 강력한 법과 제도의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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