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친정아버지 백수연(白壽宴)

  • 입력 2018.01.19 11:46
  • 수정 2018.01.22 11:18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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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께서 올해에 99세가 되십니다. 살아계신다면 금년 생신날에 기념잔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래들의 아버지에 비해 훨씬 연세가 많으신 편이지요. 그런 아버지의 문화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나의 이름이 최대한 토속적이고 촌스럽습니다.

구점숙(경남 남해)

친구들 이름은 미정이나 미경 등 비교적 그 시대가 반영된 편이지만, 1919년생 아버지께 막내딸 이름이 말숙이든 점숙이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그저 덩달아 잘 커 주라는 기대만 있었겠지요. 더러 개명을 권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선견지명(?) 덕택에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니 그냥 이대로 살겠다고 농으로 화답합니다.

살면서 힘들 때마다 이 모든 것이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때문이라고 원망 아닌 원망의 결론을 내리고는 했습니다. 그러다가가 최근에서야 새로이 눈을 뜨게 된 것이 있었으니, 나의 상당한 기질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나의 것이라 여겼던 기질이 실은 대부분 물려받은 것이고 그것은 전답을 물려주신 것 이상으로 값진 것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깨달음은 이렇게 항상 늦습니다.

나 뿐 아닙니다. 두 언니들도 비슷한 양상입니다. 언제나 힘이 펄펄 넘치니 그것도 다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두 언니들과 도모할 일이 있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올해 생신이면 백수를 맞으시는 친정아버지의 생신잔치를 우리 딸들이 해보자는 제안입니다.

볕 좋은 어느 날 언니들을 만나 의논을 했더니 그것 좋다고 합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많은 언니들은 더한 애틋함으로 흔쾌하게 답변을 하나 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백수연 잔치는 양식이 따로 없으니 생전에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던 대구탕이나 가오리회무침 정도로 주 메뉴를 정하면 되겠지요.

그런데 나에게는 이리도 의미 있는 일이 올케언니들에게는 난데없는 부담이 되겠지요? 얼굴도 뵌 적 없는 시아버지의 백수연을 하겠다고 느닷없이 딸들이 안을 던지게 되면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사연이 없으니 또 하나의 의무감으로 느껴질 것이고 잔치음식장만에는 경제적 부담을 떠안게 될 것이니 그것도 마뜩찮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롯이 딸들이 부담을 지기로 한 것입니다. 없던 일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부담지울 일이 뭐가 있겠냐며 자발적으로 나서는 것이지요.

하고보면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부담을 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윗대 어른들의 제사를 의무적으로 지내는 것 하며, 새해를 맞는 즐거움도 명절제사 준비로 바쁘고, 시월이면 시제까지 모시니 조상님 덕에 사는 삶이기는 하나 조상님으로 지는 짐이 무겁기 짝이 없네요.

그것의 시작이 수천 년 전의 이웃나라 왕조가 정통성을 가지기 위해서 만든 예법이라 하니, 그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위주로 계승되고 있습니다. 벌을 피하고 복을 구하는 차원에서 진행된다지만 되짚어 볼 문화라는 생각이 거듭 듭니다. 아니면 그 부담을 진정 보람으로 만들던지요.

특히 농촌에서는 더 강한 전통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요. 친정아버지의 백수연을 준비하며 생각이 여기까지 웃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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