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공중전화③ 쌀집·연탄집에도 공중전화가 있었다
[그 시절 우리는] 공중전화③ 쌀집·연탄집에도 공중전화가 있었다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8.01.1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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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동대문 전화국 직원이었던 김기태씨는 그 시기에 이미 가정을 이룬 데다 만학(晩學)을 하는 처지였으므로, 생활이 매우 곤궁하였다. 어느 날 과장이 그를 불렀다.

이상락 소설가

“부인이 임신했단 얘기를 들었는데… 뒤늦게 공부하랴, 가장 노릇하랴, 힘들지?”

“아닙니다. 할 만합니다, 과장님.”

“내가 기태씨한테 특별히 선물을 하나를 하려고 하는데 말이야….”

“저한테 무슨 선물을…”

“김기태씨 명의로 공중전화 한 대를 인가해줄 테니까, 부인한테 관리하라고 해서, 대학 등록금이라도 벌도록 해봐요.”

“예? 감사합니다, 과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체신부 5급(지금의 9급) 공무원이었던 김기태씨는 뒤늦게 야간대학에 진학해서 만학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어려운 처지를 보다 못한 과장이 그의 명의로 공중전화 한 대를 인가해 주겠다고 했다. 엄밀히 따지면 그것도 불법이고 비리에 해당하겠지만, 시절이 시절이었던 만큼, 그 대목은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공중전화 설치인가가 난 곳은 그 시기에 서울시민의 유원지로 각광을 받았던 뚝섬이었다. 그러니까 길거리의 부스에 설치된 무인공중전화 말고도, 따로 관리자가 있어서 아침에 내놓고 저녁에 떼 가고 하는 식의 관리공중전화가 그 시절에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때 뚝섬에 사는 다른 사람의 연탄가게 추녀 밑에다 양해를 구해서 공중전화를 설치했어요. 아침이면 그 가게에 가서 전화를 내놓았다가, 밤이면 코드를 빼서 안으로 들여놓곤 했지요. 여름철이면 뚝섬유원지에 놀러온 사람들이 전화를 걸려고 기다랗게 줄을 섰어요. 아내는 동전을 바꿔주느라 정신이 없었고요. 그때 공중전화 한 대 인가받아 들여놓으면요, 담배 가게 차린 것보다 수익이 훨씬 좋았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김기태씨는 근무를 마치자마자 뚝섬으로 달려가서 아내와 함께 전화통에 든 동전을 수거한 다음 전차를 타고 시내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는데, 전차를 내린 부부는 놀라 팔짝 뛰었다.

“아이고, 내 돈주머니!”

깜박 동전 주머니를 전차에 놓고 내린 것이다.

“꽤 여러 날 동안 꺼내지 않고 모았던 돈이거든요. 하도 ‘큰 사건’이라 지금도 액수를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정확하게 875원이었습니다. 얼마나 맘이 상했던 지요.”

이런 식으로 개인이 관리하던 공중전화를 체신부에서는 ‘관리공중전화’라 불렀다. 주로 다방이나, 연탄가게나, 쌀집, 혹은 구멍가게들에 설치하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당시의 어려운 생활여건에서 공중전화 관리자에게 떨어지는 수익금도 무시할 게 못 되었지만, 전화를 설치해두면 우선 사람들의 왕래가 잦게 되고, 그것이 장사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주황색의 그 공중전화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매우 치열하였다.

당시 서울체신청의 전화가설 부서에서 근무했던 하도식씨의 얘기.

“관리 공중전화가 그렇게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너도나도 그걸 설치하려고 이런저런 연줄을 대어서 로비가 치열했지요. 하지만 수요자는 넘치고 시설은 한정돼 있으니 그 요구를 다 들어줄 수는 없었지요. 전화 한 대만 놓으면 변두리 담배 가게보다 수익이 나은 데다, 전화기를 설치한 가게의 수익에도 크게 기여를 하니까, 서로 놓겠다고 야단이 났지요. 연탄가게, 쌀가게, 미용실, 다방, 어물전, 문방구점…. 사실 할 말은 아니지만…그 관리공중전화 허가해 주는 부서에 근무했던 직원들은 뭐, 음으로 양으로…썩 잘 나갔다고나 할까….”

어쨌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경우 이런 저런 형식의 공중전화가 꾸준히 증설되어서 서민들의 통신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여가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런 혜택을 기대할 수 없는 농촌이었다. 그 얘기는 다음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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