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농민권리선언, 농민의 것은 농민에게

[신년특집] 농민권리보장과 농민수당
- 비아에서 유엔까지-

  • 입력 2017.12.31 11:25
  • 수정 2018.01.02 11:07
  • 기자명 윤병선 건국대 교수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병선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헌법 개정과 관련해서 최근 농업계에서 화두로 떠오른 것이 농민권리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주체가 농민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농민에 방점이 찍힌 권리가 이야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가)과 직접적인 고용관계를 갖는 노동자의 권리는 오래 전부터 법에 의해서 보장되어 왔다. 노동시간이나 임금, 노동환경 등에 대한 공적인 개입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농민의 경우에는 직접적인 자본-임노동 관계에 포섭되지 않고, 스스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주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한다는 특성상 공적인 형태의 개입은 주로 농산물 가격지지정책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을 뿐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확산과 우루과이라운드(UR)에 이은 WTO체제가 구축되면서 농민들에 의해서 계승·발전돼 왔던 필수적인 생산수단(토지, 물, 종자, 삼림 등)은 거대자본인 초국적 농기업의 완벽한 지배 하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농산물가격도 시장에 팽개쳐졌다. 거대 자본은 살충제와 제초제, 화학비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버렸고, 여기에 국가도 가세했다. 농민의 손에 남은 것은 오염된 용수와 땅이었고, 황폐한 농촌마을이었고, 빈 쭉정이 수확물이었다. 지구 곳곳의 여러 지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런 부당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슬로건이 식량주권이었다. 전세계의 농민조직들로 구성된 초국적 운동조직인 비아 깜페시나(‘농민의 길’, ‘비아’)는 규제완화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신자유주의 정책이 자본에게는 해방이, 농민에게는 족쇄가 되었다는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1996년 식량주권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농민들이 발전시켜 온 종자를 탈취하여 이윤을 사유화하고, 유전자원과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GMO를 비롯한 안전하지 못한 먹거리의 도입을 강요하는 거대 초국적 농기업들이 지배하는 농식품체계를 농민을 비롯한 민중 스스로에 의해서 결정하는 농식품체계로 돌려놓는 것이 식량주권의 지향점이다.

이후 식량주권은 농민권리로 진화했다. 2002년 비아의 회원 단체인 인도네시아 농민연합(SPI) 주도로 식량주권에 근거하여 농민권리선언 초안이 만들어졌고, 2009년 서울에서 개최된 비아 국제조정위원회에서 선언문이 승인됐다. 농민권리, 생활수준의 권리, 종자에 대한 권리, 가격과 시장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 농업가치 보호에 대한 권리 등 총 13개 조로 이루어진 농민권리선언은 현재의 기업농식품체계에 대항하여 식량주권-생태농업 모델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권리를 담고 있다.

2012년에는 비아의 농민권리선언이 유엔 내에서 공식적인 의제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엔에 제안된 많은 권리 의제들이 공식적인 절차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농민권리는 공식적인 의제로 채택됐던 것이다. 이는 2008년의 세계적 식량위기를 통해서 농업과 먹거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국제적으로 깊어진 것도 한 몫을 했지만, 비아를 비롯한 농민운동조직과 사회운동조직이 공동의 작업으로 만들어 낸 성과이기도 했다.

물론 유엔의 농민권리선언에 담아지는 내용이 비아의 농민권리에 담긴 모든 내용을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초국적 농기업의 이해와 대립되는 종자 등 민감한 부분은 빠져있다. 지난 9월에는 2018년 실무그룹 회의를 개최하여 논의를 계속할 것인가에 대한 표결에서 유엔 인권이사회 47개 국가 중에서 미국과 영국 오직 두 나라만 반대를 했는데, 한국은 기권을 택했다. 헌법 개정 논의에서 농민권리에 대한 광범한 공감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정부가 선택한 기권은 중립이 아니다. 촛불을 바탕으로 탄생한 문재인정부는 박근혜 전 정부와 동일하게 기권을 선택했지만, 최종적, 불가역적 결정이 아니기에 희망을 갖는다. 

한편, 비아가 농민권리선언을 의제화하면서 유엔 농민권리선언을 성사시키는 것보다 공론화 과정을 통해 사회적 공감과 지지를 끌어 모으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 하나, 농민의 것을 농민에게 돌리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해서 농민이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도 필요하다. 농민권리는 농민들만의 것이 아닌,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이들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