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식량주권을 내준 결과, 기아와 비만의 이중주

[신년특집]농민권리와 농민수당
기고_허남혁 전 지역재단 먹거리정책 교육센터장

  • 입력 2017.12.30 23:47
  • 수정 2017.12.31 12:04
  • 기자명 허남혁 전 지역재단 먹거리정책 교육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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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혁 전 지역재단 먹거리정책 교육센터장

2007년부터 2008년 전세계를 덮친 글로벌 식량위기 상황에서 민중폭동과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특히 문제가 되었던 나라는 자국의 농업기반을 점차 상실하고 값싼 수입곡물에 의존한 나라들이었다.

80년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으로 쌀 시장을 개방한 후 더 값싼 미국 쌀에 밀려 생산기반을 상실한 카리브해의 아이티(식량자급률 50%선), 우리에게 70년대 녹색혁명의 기반을 제공할 정도로 쌀 생산대국이었으나 2000년대 들어 급속히 생산기반을 상실하며 곤란을 겪은 필리핀(최근 쌀 자급률이 다시 90%를 상회), 60년대 이후 미국의 원조 밀가루에 의지하며 급격하게 식량자급률이 떨어진 세계 밀 수입 1위국 이집트(현재 밀 자급률 50%선) 등이다. 요약하면, 개발도상국이면서 수입식량에 의존성이 높은 나라들이다.

다음으로, 글로벌 식량위기 때 다행히 주식인 쌀의 자급력을 지키고 있었기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지만, 고질적으로 낮은 식량자급률을 보이는 지역이 바로 한국, 일본, 대만의 동아시아권이다. 세 나라 모두 칼로리 기준 식량자급률 40%선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미국의 원조식량부터 시작해 밀과 사료·유지작물(콩, 옥수수)을 점차 미국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존성은 소비성향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전통적 식단에서 서구형 식단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빵과 고기의 소비를 늘리기 위해 영양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을 빌린 정책적(심지어는 폭력적인) 개입도 분명했다. 이들 국가들은 현재도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밀, 콩, 옥수수, 쇠고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로 손꼽힌다.

미국-멕시코의 농업생산-유통-가공-소매흐름과 상호커넥션(직업과 환경건강의 국제저널, 2012년).

마지막으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이 가져온 중장기적 결과를 잘 보여주는 멕시코와 캐나다의 사례다. 멕시코는 식량주권의 상실이 장기적으로 농업과 국민 건강, 즉 생산과 소비 양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나프타, NAFTA)이 체결되면서 미국, 캐나다, 멕시코는 무역장벽과 투자장벽을 상호철폐했다.

멕시코는 미국에 과일과 채소류, 주스를 수출했고, 미국은 멕시코에 육류, 콩·옥수수(사료용), 가공식품을 수출했다. 사료용 노란옥수수의 수입이 급증하면서 옥수수 자급률이 최근 63%선까지 하락했지만, 멕시코의 주식인 흰옥수수의 생산은 계속 유지됐다. 하지만 가격은 나프타 이후 큰 폭으로 하락했다.

멕시코의 주곡 작물인 옥수수 자급기반은 겉으로는 몰락하지 않았지만, 농업조건의 악화로 500만명에 달하는 소농들이 퇴출되고 그 자리가 옥수수 대농장으로 대체되는 격변을 겪었다. 멕시코 옥수수 유통가공 국영기업의 자리를 미국 농식품기업들이 차지하면서, 국민들의 주식인 토르티야(옥수수빵)의 가공과 유통을 장악하게 되었고 가격이 계속 올랐다.

바로 며칠 전 미국 <뉴욕타임즈>는 나프타 이후 멕시코에서 어떻게 비만이 증가하는지 심층기사로 다뤘다.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농식품기업들의 멕시코 직접투자와 미국산 가공식품 수입의 급증이었다.

멕시코의 주요 식품기업과 유통기업은 대부분 미국계이거나 미국이 지분투자한 기업들이다. 2017년 멕시코 비만율은 OECD 국가 중 미국(38.2%) 다음 2위(32.4%)다. 멕시코는 전 세계에서 미국보다도 가공음료와 식품의 칼로리를 더 많이 섭취하는 세계 1위가 되었다. 미국은 멕시코에 ‘비만’을 수출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최근 나타나고 있다.

올 여름 캐나다의 의학잡지에, 나프타 체결 이후에 관세장벽이 철폐되면서 옥수수로 만드는 고과당 시럽이 들어간 각종 청량음료 수입의 폭증이 어떻게 캐나다 국민들의 비만으로 이어졌는지에 관한 논문이 실렸다. 지난 2006년 캐나다 먹거리활동가 웨인 로버츠가 방한했을 때, 나프타로 인한 캐나다 국민들의 비만과 보건비용 문제를 한국도 깊이 곱씹어봐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각종 데이터를 통해 자유무역으로 인한 식량주권 상실 문제가 어떻게 농민과 국민건강 양쪽 모두를 피폐하게 만드는지 확인할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식단의 변화를 신자유주의적 식단(neoliberal diet)이라고 부른다. 식량주권의 약화로 인한 신자유주의적 식단이 국민들의 건강에 위해를 가하게 되는 현상이다. 식량자급과 식량주권의 문제가 단지 농업과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국민 모두가 그 피해를 입게 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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