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새해에는 가계부 쓰는 재미가 있는 삶

  • 입력 2017.12.29 10:12
  • 수정 2017.12.29 10:14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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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에서 새로이 제작한 가계부를 지점마다 비치해뒀다고 필요한 사람들은 챙겨가라고 공지합니다. 고맙게도 말입지요. 농협 가계부는 짜임새가 좋습니다. 수입과 지출항목도 큼직하니 쓰기 좋고, 빈 공간 곳곳을 살려 농촌축제도 알리고 제철요리 재료와 요리법도 안내합니다.

구점숙(경남 남해)

지역축제와 제철 농산물을 알리는 일도 따지고 보면 농가소득을 높이고 지역경제를 활성화 시키고자 하는 고민이겠지요. 곳곳이 농업과 농촌에 대한 농협의 고민이 담긴 풍성한 가계부입니다.

그 좋은 가계부의 용도가 나에게는 농사일지에 불과합니다. 처음에는 수입과 지출, 제사며 가족들의 생일까지 꼬박꼬박 기록하는 재미로 가계부와 만났는데 어느 순간 지출중심으로만 기록되는 가계부가 재미없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농가지출의 대부분이 농자재인데 내가 살 때와 남편이 살 때가 달라 일일이 알아서 기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가계부 본래의 기능은 쏙 빠져버리고 고추 정식일이며 일차 추비나 태풍피해 등을 적는 농사일지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지출을 얼마 했는지 적는 일보다 그날그날 무슨 일을 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 훨씬 재밌으니까요. 계획했던 일을 일단락 지어가는 일이 보람차기도 하거니와 다음 할 일을 계획하는 것까지 동시에 이뤄지니 그 맛에 농사일지만을 적는 것입니다.

나만 그런가 싶어 살림 좀 하는 언니들한테 가계부를 적고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다들 안 적는다고 합니다. 역시나 지출만 있어서 쓰기 싫어졌다고, 일정한 소득이 있어서 그로부터 지출을 계획할 수 있다면 가계부를 적는 의미가 있을 텐데 그렇지 못 해서 중도에 그만뒀다고들 합니다.

그러고는 남편들이 배를 타거나 막노동 작업을 꾸준히 해서 일정하게 월급을 가져올 때는 그럭저럭 또 가계부를 적었다고 귀띔을 해주기도 합니다. 그러자 한 언니가 큰 소리로, 나름 알뜰하게 살고 뼈 빠지게 일하는데도 수지계산을 하다 보니 번번이 적자살림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돼 가계부를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그 말에 “아, 그렇지 그게 핵심이야!”라고 맞장구를 칩니다. 게으름도 귀찮아서도 아닌, 그야말로 적자투성이인 농가살림에 저마다 가계부를 손 놓았다는 것을 확인한 셈입니다.

그러니 깔깔한 종이에 공간분할이 잘 돼서 고급스러운 농협가계부를 공급하는 일에만 앞장설 것이 아니라 가계부를 제대로 쓸 수 있는 농민의 삶을 다각도로 고민하는 것을 더 우선해야겠습니다.

물론 5,000만원의 농가소득을 실현하고자 노력한다고 광고하는 성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말입지요. 뭐 농협한테만 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농협가계부를 손에 넣고 보니 생각이 많아져서입니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바라건데 올해는 우리 여성농민들에게 가계부 쓰는 재미가 있는 해였으면 합니다. 매달 주어지는 농가의 소득으로 수입과 지출의 계획이 제대로 이뤄지면 좋겠고, 도시와 견주어 균형을 이루는 소득수준이 되면 더욱 좋겠고, 무엇보다 여성농민의 노동이 환산되는 소득이 있어야겠지요.

거기에 여성농민 행복 바우처 카드를 멋지게 긁으며 영화 한 편을 봐도, 차량에 기름을 가득 채우고 먼 길을 떠나도 보람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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