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국민학교⑤ 비잋나??졸읍장을 타신 언니께…

  • 입력 2017.12.29 10:10
  • 수정 2017.12.29 10:1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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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졸업식이 열리는 어느 시골 국민학교.

학부모 뿐 아니라 동네 유지들까지 모여들어 아침부터 교정이 잔치 분위기로 넘쳐났다.

이상락 소설가

“에, 또…육개성상(六個星霜)을 묵묵히 극복하고 드디어 오늘 졸업의 영광을 안은 학생 여러분! 여러분은 장차 이 나라의 동량(棟梁)으로서…”

대개 교장선생님의 축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냥 ‘6년 세월’이라 하거나 ‘나라의 기둥’이라 하면 될 것을, 어쩔 수 없는 한문세대인 어른들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축하의 말씀마저 꼭 그렇게 어려운 말을 앞세웠다.

흰 건반 서넛이 빠져나가고 검은 건반 두어 개도 고장이 난 낡은 풍금은 그 날도 여전히 제 소리를 찾지 못 하고 삐걱댔지만, 풍금 앞에 앉은 3학년 선생님은 오늘은 화를 내지도 않았고 ‘이놈의 고물 덩어리!’ 운운하며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이 날은 풍금보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더 흔들렸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보통은 윤석중 작사의 이 노래를 졸업가로 삼았다. 그 시절에도 도회지 학교에서는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 교문밖에 꽃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장에 ‘꽃다발을 한 아름’ 갖고 와서 선사하는 축하객은 없었다. 들과 산에 지천으로 널브러진 게 꽃이었으므로 그걸 꺾어다 준다 한들 별스럽게 고마워 할 건덕지도 뭣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졸업하던 해에 우리 학교에서 불렀던 졸업식 노래는 달랐다.

눈비를 이기고 닦아온 여섯 해

오늘은 보람 이룬 영광의 졸업 날…

그러나 졸업가가 어떤 노래이든 그 구성은 똑 같았다. 제1절은 선배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그 전도에 행운이 있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고 제2절은 아우들아 잘 있거라,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런 마음을 담았으며 제3절은 ‘냇물이 바다에서 다시 만나듯’ 우리도 넓은 세상에서 다시 만나 고장과 나라를 빛내자, 대충 이런 구성이었다.

졸업가를 부를 때부터 간간이 흐느낌이 들려오던 졸업생 쪽 좌석은, 재학생의 송사 낭독이 끝나고 졸업생이 답사를 읽을 즈음이면 거의 울음바다로 변했다. 나도 울었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느냐고? 생판 낯선 이방인끼리도 며칠 함께 지내다 헤어지면 눈물이 날 판인데, 그야말로 ‘6개성상’을 몸담았던 학교를 떠나려는데 멀쩡하다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닌가? 그런데 중학을 졸업할 때 보니 울기는커녕 (나는 울고 싶었는데)모두가 ‘야호!’를 외치는 분위기였다. 내 딸아이는 한 학년이 무려 20여 학급이나 되는 도회지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졸업하던 날 “안 슬프냐?” 그랬더니, “아빠는 촌스럽게…” 이런 대답이 건너왔다.

옛 시절 졸업식의 축사나 혹은 졸업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은 ‘영광’이었다. 그랬다. 그들이 받은 국민학교 졸업장은 충분히 빛이 났고 또한 영광이라 할 만 했다. 그 시절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 하게 된 아이들은 끼리끼리 자조적으로 이런 말을 주고받았다.

“넌 졸업하고 뭣 할래? 난 지게대학에나 가야겠다.”

“아이고, 나도 장군대학에나 가야지 뭐.”

장군은 변소의 분뇨를 퍼내는 통이다. ‘농사짓는 일’이 그만큼 천대를 받았던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묵묵히 고향과 선산을 지키는 ‘굽은 나무’의 구실을 했던 그 지게대학과 장군대학의 학생들이, 우리의 농촌과 촌락공동체를 이만큼이라도 지켜 왔다. 그들에게는 초등학교 6년이 평생 유일한 학창시절이었을진대, 졸업식장에서 어찌 눈물이 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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