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투쟁은 필연이고 운명이다

  • 입력 2017.12.17 14:51
  • 수정 2017.12.17 14:52
  • 기자명 강광석 강진군농민회 성전면지회 사무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재인정부가 밥쌀용 쌀 1만5,000톤에 대해 입찰을 공고했다. 지난 2015년 쌀 수입 완전 관세화 조치가 단행된 이후 실시된 밥쌀용 쌀 수입 대부분은 미국산이다. 쌀 의무수입 물량 중 30%는 밥쌀용 쌀로 수입해야 한다는 강제 조항이 삭제된 이후에도 정부는 일관되게 밥쌀용 쌀을 2016년 6만톤, 2017년 5만톤 수입했다. 박근혜정권 탄핵이후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 5월 8일 입찰 공고를 한 것을 두고 박근혜정부의 마지막 몽니라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문재인정부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기대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뒤섞여 있던 순간이었다.

문재인정부는 여러 면에서 박근혜정부와 달라야 하고 또 다를 것으로 기대했다. 무엇보다 지난 이명박·박근혜정권을 통해 공고화된 적폐를 청산하는 촛불의 염원을 안고 태어난 정권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대는 더욱 선명하다.

그런데 사실 적폐라는 것이 지난 9년 동안 쌓인 것이라기 보단 해방이후 70년 동안 공고화된 고질적이고 구조적인 것이기에 기대와 우려는 항상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가령 양심수 석방의 경우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석방 가능성에 비해 이석기 의원의 석방 가능성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과 같은 것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개정될 수 있으나 사드배치는 철회될 수 없으리라는 전망과 같은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공공비축미 환수 문제는 해결될 수 있겠으나 밥쌀용 쌀 수입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의 근저엔 항상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문재인정권 초기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북관계는 북미관계의 종족변수로써 한미동맹이 민족동맹을 강제한 지난 경험으로 보면 남-북 정상회담은 난망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밥쌀 수입 공고를 철회하지 않고 입찰 실시를 용인한 것은 농업에 관심이 없던지 아니면 농업적폐를 청산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밥쌀 수입 반대를 외치다 돌아가신 백남기 농민의 뜻을 거부한다는 것을 말한다.’

지난 5월 16일, 대선 일주일 뒤에 전농이 발표한 쌀 수입반대 성명이다. 농업적폐의 핵심은 개방농정과 저곡가 정책이다. 개방농정의 상징은 밥쌀용 쌀 수입 개방이다. 2015년 거족적인 민중총궐기에 농민진영이 건 핵심 구호가 밥쌀용 쌀 수입 반대와 개방농정 철폐였다. 백남기 농민의 서거는 개방농정을 역사의 무대에서 지우라는 농민의 숙명적 과제를 형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통상교섭본부장에 김현종을 임명해 놓고 한-미 FTA 개정협상에서 농업만을 지키겠다는 정부의 의지는 또 얼마나 허망한가.

올해 하반기에 불고 있는 농민헌법 쟁취투쟁의 핵심은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식량주권과 농산물 최저가격 보장의 물꼬를 트자는 것이다. 이는 개방농정의 역사를 뒤로하고 식량에 대한 민족 국가 단위의 자주적 생산 및 유통 공급 체계를 수립하자는 뜻이다. 자국의 농업 발전에 대한 고유한 권리는 자주적 권리이며 신성불가침하다. 자주성을 견지하는 모든 국가의 당연한 권리다. 개방농정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제당한 것이며 자주적 권리가 아니라 종속적 결과이다. “450만톤 중에 겨우 5만톤이 밥쌀용 쌀 수입 물량인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문재인정부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떠드는 모양이다. ‘밥 한 공기에 돌멩이 서너 개 들어있는 것이 뭐 대순가’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아픈 것은 참아도 아프다. 노무현정부 시절 이라크 파병이 아팠던 것처럼, 한-미 FTA 체결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밥쌀용 쌀 수입으로 문재인정부의 농업정책의 바닥은 이미 가늠됐다. 맑아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물이 없어서 보인다. 농업을 비교우위와 효율성과 경제 지표로 보는 순간 개방농정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적폐를 청산하지 않고 적폐와 동행한다면 농민은 그 정권과 투쟁해야 한다. 필연이고 운명이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