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아직도 보내지 못한 가을

  • 입력 2017.12.08 15:09
  • 수정 2017.12.08 15:12
  • 기자명 김정열(경북 상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쾌함은 차가움인가 보다. 12월 초입의 세찬 바람이 춥게 느껴지기 보다는 쨍한 쾌감을 안겨준다. 머리가 맑고 명료해진다. 또 한 살의 무거움에 대해 생각하는 올해의 마지막 달이다.

김정열(경북 상주)

우리 마을은 하우스 농사가 없다보니 12월이면 모든 농사가 마무리 된다. 긴 가뭄에 애 태우던 봄날도, 뜨겁다는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 했던 더위도, 징그러웠던 병충해도 어느새 남의 일 같은 지난날이 되어 버렸다. 수확량이 많던, 적던 모든 수확은 끝났고, 수입이 많던 적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아침에 본 마을회관에는 활기가 돌았다. 어르신들은 어르신대로 중년층은 중년층대로 지난 가을이 바빴다. 이제는 그런 가을을 보내고 회관에 둘러 앉아 같이 먹을 밥상을 여유 있게 차리는 계절이 됐다.

그러나 아직도 그 분주한 가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여전히 바쁘다. 땅이 꽁꽁 얼어붙어도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아있다. 긴 겨울을 보낼 김장과 일 년 두고 먹을 메주를 쑤어야 한다. 담아야 할 김치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배추김치, 무김치, 무말랭이짠지, 깻잎김치, 고들빼기김치, 동치미 등등 내 몸만 좀 고달프면 온 식구가 맛있게 먹는다 싶어 쉬고 싶은 몸을 조금만 더 힘내자고 스스로 다독이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더 참자. 이제 다 해 간다.

또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씨앗을 갈무리 하는 일이다. 내년 농사의 시작인 종자를 잘 가려 놓아야 뜨끈한 아랫목에서 할 일 다 해 놓은 자의 평안을 맞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아직 종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내년 씨앗을 가리는 일은 시간도, 마음도 여유가 있어야 할 수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올 농사로 인한 서글픈 마음, 아쉬운 마음, 속상한 마음들이 해탈한 스님마냥 안정이 되고 나서야 다시 내년 농사의 시작인 종자에 손이 간다.

대충 털어 놓기만 했던 콩에 손을 댄다. 검불과 쭉정이를 골라낸다. 들짐승에, 노린재에, 가뭄에 반은 쭉정이로 남은 콩 농사였지만 그 중에서 굵고 탱글탱글하게 잘 여문 것으로 가린다. 가려놓은 콩에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래, 이렇게 우리의 삶 또한 빛나리라.’ 내 마음을 내가 위로하며 가려 낸 콩 씨앗에서 아름다운 여성농민들을 발견한다.

조금씩 심은 토종씨앗도 갈무리 한다. 몇 포기밖에 안 심어서 겨우 내년 종자할 것만 건진 토종고추씨, 잎을 먹는 흰동부는 씨앗이 많다. 우리 회원들에게 나눠 줄 수도 있겠다. 초가을부터 주렁주렁 달리는 대로 볶아먹던 갓끈동부도 내년에는 많이 심을 수 있을 것 같아 흐뭇하다.

꽃대가 늦게 올라가는 상추씨도 받아 놨으니 내년에는 늦여름까지 아쉬워하지 않고 실컷 먹을 수 있겠다. 마디마다 조랑조랑 달리는 오이 씨앗도 받아 놓았다. 이 오이 씨앗만 있으면 내년 여름 입맛 없을 때, 찬물에 밥 한 술 말아서 노각 고추장 무침과 먹는 밥상 예약이다. 하나하나 씨앗을 손으로 만지며 속이 빈 쭉정이는 버리고 포동포동한 씨앗만 남긴다. 어느새 마음은 내년 봄날의 부풀어 오른 흙살에 가 있다.

짧은 겨울해가 금방 기운다. 곧 동지가 다가온다. 어른들 말씀이 동지 팥죽 한 그릇 먹고 나면 한 살 더 먹는 것이라 했다. 우리 여성농민들에게는 달콤한 동지 팥죽 한 그릇이 길고 고단했던 가을을 보내는 이별식이 될 것 같다.

힘들었던 우리 옆에서 함께 했던 2017년이여, 이제는 안녕.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