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낭만살이

  • 입력 2017.11.26 15:34
  • 수정 2017.11.26 15:36
  • 기자명 구점숙(경남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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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자신이 태어난 생일이랄지 결혼기념일이랄지, 심지어는 나라에서 정한 국경일도 뭐 그리 중하냐 싶을 때가 있습니다. 매순간 충실하게 살지 않으면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척박한 농촌살이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눈 뜨자마자 일로 시작해서 잘 때까지 일입니다.

힘들고 바쁠 때는 유일한 휴식시간인 점심 식사시간이 기다려지고 잠자리에 들어서 다리를 뻗을 때가 제일 행복하기도 하지요. 먹고 잠자는 일 외에 삼라만상 재미있는 일들이 하고 많은데도 그 시간이 좋을 지경이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가계비중에서 식료품 구입비 비중이 제일 높을수록 가정경제가 곤궁하다 했는데, 하루 중에 무엇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 재미있냐는 질문에 따른 답으로 삶의 질을 규정하는 그런 생활 척도 검사는 없을까요? 있다면 필경 식사와 잠이 가장 아래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내일을 예측하기 힘든 농업환경에서 개인적인 기념일을 챙기는 호사를 누리려면 적어도 자식이 번듯하게 경제활동을 하는 세대이겠지요? 그 전까지는 일에 파묻혀서는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모르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이른 바 세대주로 호칭되는 남편과 아이들의 생일은 미역국을 동반한 생일밥상으로 챙겨질 것입니다.

또 세월이 많이 바뀌어서 젊은 남편들은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챙기기도 합니다. 이른바 어중간한 세대는 지금도 자신의 생일을 누군가로부터 의미 있게 챙김 받고 있지 못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겠지요.

이런 사정을 일찍부터 봐온 이웃마을의 언니들이 생일계모임을 한답니다. 아무리 봐도 누가 내 생일에 미역국 끓여줄 이가 없으니 스스로가 스스로를 챙기는 의미로다가 계모임을 시작한 것이 족히 10년은 넘었다지요? 계원의 생일날 저녁에 같이 식사를 하며 자축을 하는 것입니다.

하긴 뭐 생일을 가족끼리만 챙겨야 한다는 것이 법령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지요. 여성농민들의 성정이 그대로 반영되는 모습입니다.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며 따뜻한 삶의 자세가 생일 챙기기에도 나타나는 것이지요.

여성농민이 타고 날 때부터 이러한 성정을 지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워낙 척박한 농촌 환경에서 기댈 곳 없이 적응해내느라 이러한 기질이 발동됐을 것이며 그 와중에도 생명을 키우고 돌보는 활동으로 말미암아 특유의 생기와 자애로움을 갖게 됐겠지요.

할 수 있다면, 아니 굳이 못할 이유도 없지요. 가족이나 주변 분들을 따뜻하니 챙기기로 해요. 읍내까지 가서 근사한 꽃다발을 사거나 언제나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금붙이 선물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철따라 피어나는 들꽃 한 묶음이라도 그 마음을 담는다면야 부러울 게 없겠지요.

풀잎하나 없는 겨울에는 어쩌냐구요? 이런, 사랑은 창의성을 키운다고 하잖아요. 마음을 담은 노래 한 곡도 제값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형편이 충분한데 해마다 들꽃다발만 내밀고 노래 한 곡조로 퉁 치려는 인색함이라면야 좀 실망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농촌살이가 갈수록 척박해진다고 염려들이 많지요. 그 가운데서 낭만조차 없다면야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낭만은 누가 택배로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서로의 기념일을 챙기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조금은 따뜻한 겨울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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