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밀수④ 고구마 밭에서 밀수품을 캐다

  • 입력 2017.11.17 13:24
  • 수정 2017.11.17 13:2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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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세관 밀수단속반 반장 책상의 전화가 울린다. 신고 전화다. 통화를 마친 반장이 출동명령을 내린다. 조사관들이 후다닥 사무실을 나섰는데, 신참 조사관이 의아해서 묻는다.

이상락 소설가

“반장님, 지금 항구에 들어온 선박 없는데 뭘 조사해요?”

“입항한 선박을 조사하러 가는 게 아니라, 돌산도로 가는 거야.”

“돌산도에는 왜…?”

“어젯밤에 한 어선이 밀수품을 돌산도로 싣고 가서 대량으로 감춰뒀다는 거야. 서둘러!”

세관에 신고 된 밀수 정보는 대개 정확히 들어맞았다. 분선 밀수는 일본에서 들어오는 화물선의 선원들과 현지 어선의 선주 사이에서 사전 계약에 의해 이뤄진다. 그런데 지분문제로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애당초의 선주는 빠지고 다른 사람이 가담하는 경우,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식으로 세관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야간에 바다에서 분선 작업이 일차적으로 성공하면, 밀수꾼들은 밀수품을 급한 대로 일단 여수 앞바다의 돌산도에 감춰두는 경우가 많았다. 날이 밝으면 그 물품들은 순천의 도매상으로 옮겨지고, 이후 광주에서 일차 소비가 되었으며, 그래도 남은 물건은 서울까지 올라갔다.

“당시만 해도 돌산섬은 한 집 걸러 술집이었어요. 경기가 참 좋았지. 돌산갓김치? 에이, 그건 어디까지나 반찬이고, 주식은 밀수였다니까요.”

1970년대만 해도 돌산도 사람들은 순전히 밀수 때문에 먹고 살았다…그 시절 여수세관에 몸담았던 이염휘 조사관의 과장 섞인 회고담이다. 물론 일반 주민들이 밀수에 직접 가담했다는 뜻은 아닐 터이다.

“대체 밀수품을 어디다 숨겼다는 거야? 밑도 끝도 없이 밭에다 감췄을 것이라고 했는데….”

조사관들은 마을 인근의 서속밭이며 수수밭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으나 허탕이었다. 꾼들이 밀수품을 마을 뒤쪽의 야산에 숨겼다가 적발되는 사례는 더러 있었어도, 사방이 툭 터진 밭에 감추는 경우는 없었다. 거짓 신고를 했구나 생각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저쪽, 밭고랑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한 조사관이 고구마 밭을 가리켰다. 초가을이라 한창 성하게 우거진 고구마 밭고랑을 따라서, 비닐보따리들이 죽 놓여 있었다.

“그날 아침 고구마 밭에서 일제 나이롱 옷감도 캐고 화장품도 캐고…수확이 풍성했어요.”

그러니까 미리 정보를 입수하고 바다에 나가 분선 현장을 적발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나, 그것을 놓쳤을 때에는 돌산도 고구마 밭의 사례처럼 그 은닉처를 찾아내는 것이 차선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지로 빠져나가는 밀수품이 많았다.

그래서 세관의 조사관들은 순천이나 광주 등지로 빠져나가는 화물차를 세워서 수색하기도 했다. 쌀가마로 위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조사관들은 일단 꼬챙이부터 챙겨들고 나갔다. 재수가 좋은 날엔 그 가마니 속에서 꼬챙이 끝에 밀수품이 줄줄이 딸려 나오기도 했다. 물론 밀수꾼들에게야 그야말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었겠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가전제품 밀수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역시 일본으로부터 건너온 것이었는데, 우리가 흔히 ‘야전’이라고 불렀던 휴대용 야외전축과 트랜지스터라디오, 흑백텔레비전 등이 주요 품목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일부 부유층 사람들은 미제 비타민 먹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물론 미군부대 피엑스를 통해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트랜지스터라디오라면 또 모를까, 부피가 만만치 않은 흑백텔레비전을 무슨 재주로 감춰 들여올 수 있었을까?

밀수품의 덩치가 커진 만큼, 당연히 선박도 그만큼 커야 했다. 1968년에 여수에 ‘호남정유’가 생겼는데, 나중엔 그 정유회사 소속의 원유 운반탱크에 밀수품이 숨어 들어오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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