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농활] 우박이 때리는 건 농민의 ‘가슴’

  • 입력 2017.11.03 14:53
  • 수정 2017.11.07 16:09
  • 기자명 권순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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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몇 차례나 기자농활을 다녀왔지만, 정작 고향 마을에서 이모와 이모부가 꾸리시는 과수원엔 한 번도 제대로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계절은 마침 한창 분주한 사과 수확철. 아주 잠깐 농활거리를 고민하던 나는 이내 무릎을 탁 치고는 이모가 계신 경북 영주로 발걸음을 향했다.

큰이모인 김정분(57)씨와 이모부 장재덕(62)씨의 과수원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다. 남의 손 타지 않고 부부 둘이서 살뜰히 꾸려가며 직거래 위주 출하를 하고 있다. 섭섭해하실까봐 성함을 적어 드리자면, 이날 농활은 외할머니인 한동희(80)씨도 함께했다.

과수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수확작업이 한창이었다. 작황이 썩 좋다는 이모의 말대로 어른 주먹 두세 개는 겹쳐놓은 듯한 사과가 바구니마다 가득 들어차 있었다. 보통은 한 손으로 딴다고 하지만 올해는 너무 굵은 탓에 두 손으로 ‘궁둥이를 받치며’ 따야 했다. 마치 사람에게 따이기 위해 만들어진 과일처럼 꼭지가 똑 똑 끊어지는 것이 신통했다.

하지만 좋은 것은 굵기뿐.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고 움푹 패여서 상품가치가 없는 게 태반이다. 지난 6월 경북 산간지역을 강타한 우박의 흔적이다. 하나하나 상한 것을 빤히 보면서 따 담자면, 내 마음이 이렇게나 안타까운데 이모와 이모부의 심정은 오죽할까. 그나마 피해가 덜한 곳이라 이 정도라니 할 말이 없었다.

“보험금 80% 나오는거에 자부담 20% 하면 60%밖에 못 받아. 거기다 영주·봉화 사과라고 하면 우박 지역으로 찍혀갖고 공판장엔 아무리 좋은걸 내도 값 못 받는다카이.” 우박에 채인 가슴, 보험에도 채이고 공판장에도 채이는 게 농민들이다.

수확한 사과는 가위로 꼭지를 짧게 다듬고 선별·포장한다. 꼭지가 끊어질세라 신중을 기해 딴 사과건만, 이렇게 가위로 다듬을 줄 알았다면 조금 덜 신중할 걸 그랬다. 일이란 게 참 그렇다. 연관이 없는 일 같아도 꼭지를 다듬고 나면 사과 따기가 한결 수월해지고, 사과를 수월하게 따고 나면 꼭지 다듬는 게 더 쉬워진다. 그동안 기자농활에서 풀 베고 말똥 치고 콩 고르던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 작업이 더 어버버 하지 않았을까.

우박은 무엇보다 선별작업을 괴롭게 만든다. 사람 좋은 이모의 표정이 한 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다. “힘이 안 나지. 정상과, 기스(흠집), 청다이(색택불량) 두세 구분만 하던걸 우박땜에 네 구분 다섯 구분을 해야 하니. 정상이 3만~4만원 하면 불량은 1만원뿐이 안 하거든. 올해는 선별하기가 진짜 짜증나.”

사과를 따고 선별하는 작업이 별 게 아닌 것 같지만 결코 쉽다고 할 수 없는 노동이다. 일손이 빠듯하다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올해는 우박이라는 실체없는 적과도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이모가 그렇게 힘겹게 농촌을 지켜가시는 동안 나는 철마다 좋은 고추며 대파, 호박을 얻어먹고, 더러는 쏟아지는 별빛 아래 화롯불에 고구마를 굽는 호사를 누렸다. “사과 따러 한 번 온네이.” 가을이 되면 한 번씩 던지는 이모의 말이, 그저 놀러 오라는 상투적인 인사가 아니라 일손을 보태 달라는 뜻임을 오늘에야 깨닫고는 새삼 죄송스럽고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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