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센 세상에 씨 뿌리는 어머니

이 사람 ㅣ 전북 정읍 여성농민 정옥련씨

  • 입력 2017.10.27 16:12
  • 수정 2017.10.27 16:16
  • 기자명 심증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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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1999년 가을 어느 날, 전북 정읍시 정우면 농민회 회의실에서 면장, 시의원 등 면내 기관장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정우면여성농민회 창립총회가 열리고 있었다. 행사의 첫 순서로 이날 참석한 여성농민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여성농민가를 합창했다.

참세상 농민세상 일구어 가는

우리는 땅의 사람 당당한 여성이다

까만 얼굴 짧은 머리 굵은 손마디

억센 가슴에 해방을 심는 세상의 어머니다

흙가슴 열고 일어서는 여성 농민, 농민이다

세상이 우리더러 뭐라고 해도

우리는 땅의 사람 시작이고 끝이다

자식치고 곡식치는 땅의 어머니

저 억센 땅에 씨를 뿌리는 세상의 젖줄이다

흙가슴 열고 일어서는 여성 농민, 농민이다

노래를 부르는 여성농민 중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이날 창립한 정우면 여성농민회에서 총무를 맞게 된 정옥련씨다.

“까만 얼굴, 짧은 머리, 흙가슴 이런 노랫말이 도시에 살 때는 못 들어봤는데…. 농사짓고 살면서 멋도 안내고 꾸밀 줄도 모르고. 농사짓는 태를 도시사람들이 낮춰 보기도 하잖아요. 노래를 부르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누구나 이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들어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물며 여성농민 당사자 심경은 오죽할까. 자식을 키우고 곡식을 가꾸는 어머니.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세상의 어머니로 헌신하는 여성농민. 행색은 누추하지만 이들이야말로 노래 가사처럼 참세상을 일궈가는 당당함으로 똘똘 뭉쳤다.

“원래 도시에서 살았어요.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했어요. 시아버님께서 농사를 지었는데, 결혼한 첫 해는 여기에 들어와 100마지기 논농사를 짓고 가을에 수확해서 절반은 아버님 드리고 절반을 우리가 가지고 광주로 나왔죠.”

그녀의 아버지 고향은 이북이고 직업군인이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살다 어머니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친구 소개로 남편을 만났고 결혼 첫 해 정읍에 들어가 농사를 짓다 분가를 했지만 시아버지는 농사철만 되면 아들을 불렀다. 농사일에 시간을 쏟다보니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광주생활 3년 만에 남편 고향에 터를 잡게 됐다.

“시아버님이 아들이 셋인데 그 중 둘째가 우리 남편이예요. 우리 남편만 아버지 농사일을 잘 도와주니까 농사철만 되면 수시로 부르는 거야. 결국 내가 들어가 살자고 했어요. 남편은 반대했는데…. 그래서 지금도 가끔 남편이 나를 원망할 때가 있어요.”

현재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북여성농민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정옥련씨가 당당한 여성농민이자 세상의 어머니 같은 넉넉한 인상으로 자택 앞에서 미소짓고 있다. 정씨는 전북여농 회장 임기를 마치더라도 계속해서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농사철 시댁 일손 돕다 아예 농촌으로

농촌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원래 넉넉하지 않았던 시댁은 땅 한 뙈기 가진 것이 없었다. 시아버지는 9남매의 장남으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오롯이 맡아야 할 처지여서 재산을 모을 겨를이 없었던 탓이다.

“들어와서 보니까 아버님께서 빚이 많아서 차압이 들어온다고 하는 거예요. 둘째 아들이 돕다가 결혼해서 많이 못 도와주니까 살림이 크게 기울기도 하고. 그래서 서울에 사는 큰 시숙에게 말했더니 파산하라고 하더라고요. 말이 쉽지, 나는 파산이란 게 영 마땅치 않고 두렵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아버님 빚을 우리 몫으로 떠안아서 갚기로 했죠.”

남편의 고향이라고 하지만 기반은커녕 시부모님 빚까지 자처해 떠안으며 정읍에서의 농촌생활이 시작됐다. 마음이 편치 않아 맡게 된 빚은 이후 10년 넘게 갚아나갔다. 심지어 정씨는 이 당시 건강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임신을 하고 임신중독증에 걸렸어요. 몸무게가 90kg까지 나가더라고요. 결국 조산을 했어요. 7개월 반 만에 아들을 출산해 인큐베이터에서 키웠죠. 출산 이후에 몸이 금방 회복되지도 않았고, 아이 낳고 4년 후엔가는 혈압과 당뇨까지 생기더라고요. 조산한 우리 애가 15살까지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이 건사도 살얼음판이었어요.”

정읍여성농민회 활동을 얘기할 때는 활기가 넘쳤다. 건강은 괜찮아졌는지 물었다.

“아들이 야구선수였어요. 야구할 때 학부모들이 뒷바라지 한다고 따라다니고 하잖아요. 엄마들이 어디 그냥 다니나요. 먹성 좋은 아이들 밥도 해주고 그랬죠. 그래서 내가 더 힘을 내야겠다, 마음먹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건강이 조금씩 좋아진 거 같아요.”

농사일과 시댁 빚 건사에 자식 뒷바라지까지, 아픈 몸이지만 책임감이 앞섰고 그 힘이 근원이 돼 건강도 찾아왔다는 거짓말 같은 실화를 확인했다. 강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숙명’이 아픈 몸도 변화시킨 셈이다.

농사일·시댁 빚 건사·자식 뒷바라지…

설상가상 이번엔 시어머니한테 치매가 찾아왔다. “아버님이 농약 치는데 같이 가신 거 같아요. 농약병을 뭔지 모르고 드신 거예요. 순창에 여성농민회 교육을 받으러 가 있는데 연락이 오더라고요. 숨 가쁘게 응급차 부르고 집으로 향했죠. 그 이후로 갑자기 병색이 짙어지면서 잘 걷지도 못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우리집으로 모셔왔어요. 집에서 2~3년 간병하다가 요양병원에 모셨는데, 어머니 뵈러 가면 두고 오기가 맘에 걸려 다시 모셔오기를 몇 번 반복하고… 결국 돌아가셨어요.”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은 처음엔 치매를 부정하다가, 나중엔 화를 내고, 그 시기도 지나면 다 놔버리더라고 정씨는 설명했다.

“아이고, 그때는 참 애처롭죠. 그러다가도 돌연 화를 낼 때는 아주 죽겠더라고요. 용변 봐 놓고 치우려고 하면 내 손 꼬집고 그러실 때, 그럴 때는 정말 폭폭 하더라고요. 힘들고 미운감정도 왜 안 들었겠어요. 그런데 나중엔 거동도 못하시니까 애처롭고 마음 아프고 속상했어요.”

치매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시아버지가 병석에 누우셨다.

“전립선 때문에 약을 드셨는데 점점 심해지고 몸까지 부어서 병원 가서 검사를 하니까 혈액암 진단이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아버님은 나 고생 덜 시키려는지 3년 정도 아프시다 돌아가셨어요. 우리 아버님은 참 좋은 분이셨어요. 밖에 나갔다 들어오시면 항상 멀리서 인기척을 내시며 들어오셨고 밖에 나가서 밥 드시는 것을 좋아하셔서 나랑 같이 내장산으로 맛난 거 먹으러 가고, 내가 모시고 나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내가 활동하느라 밖에 나가면 집도 봐주시고. 얼마나 인자하셨나 몰라요.”

열성을 다해 온 여성농민운동

여성농민들이 대부분 그렇듯 정씨도 농사를 지으며 집안의 모든 일을 걸머지고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1999년에 시작한 여성농민운동은 쉬지 않고 열성을 다해 왔다. 정읍시 정우면여성농민회 총무로 시작해서 정우면여성농민회 회장, 정읍시여성농민회 회장, 이제는 전북여농 회장을 맡고 있다.

정우면여성농민회 회장 때 풍물패를 만들자고, 정읍시 여성농민회 상임위에 제안해 ‘흙두드림’이라는 풍물패를 결성했다.

“여성농민들이 모여서 풍물을 배우면서 서로 친해지고, 집회 때 시가행진도 하고 봄에 영농발대식에 항상 우리가 길놀이를 했어요. 그 때는 젊기도 했고 참 좋았지요.”

정씨는 정우면여성농민회 회장을 맡아 활동의 폭을 넓혔다.

“면 회장 하면서 한-칠레 FTA 막는다고 온 사방 돌아 다녔어요. 그 때는 우리가 열심히 하면 막을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국회 앞 집회도 수없이 가고. 그런데 한-칠레 FTA, 그거 통과되고 나서 집에 내려오는데 죽겠더라고요. 허탈함을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게. 그러고 나서 쌀 재협상 되고 한-미 FTA까지 체결되더라고요.”

우리농업을 개방의 한복판으로 내밀은 한-칠레 FTA, 쌀 재협상, 한-미 FTA 반대를 위한 투쟁은 연일 농민들을 여의도 광장에 모이게 했다. 두 명의 농민이 경찰의 폭력진압에 유명을 달리하는 뼈아픈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농민들의 힘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을 막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씨는 2005년 홍콩에서 개최된 WTO각료회의 저지투쟁에도 참석했다.

“홍콩 투쟁에서는 우리가 풍물을 치면서 선두에 섰죠. 그 당시 드라마 ‘대장금’이 유행을 했는데, 대장금 노래를 개사해서 부르면 홍콩 사람들도 뒤따라 다니며 함께 불렀어요. 삼보일배도 하고, 매일 그렇게 행진하면서 투쟁을 했는데 피곤한 줄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나 막판에 경찰이 포위를 하고 최루탄을 쏘고 강제로 연행을 해서 감옥에 갔죠.”

홍콩 역사에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평화적인 투쟁은 홍콩시민들의 적극적 지지를 받았으나, 홍콩 당국의 강경진압과 연행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이때 연행된 사람들은 귀국일정에 맞춰 대부분 석방됐으나 몇몇의 농민들은 열흘 가까이 수감돼 재판을 받고 풀려났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농민운동진영은 진보정치 참여에 대한 요구가 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농민운동이 민주노동당을 통한 진보정치운동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맞는 지방선거(2006년)에서 조직적 출마논의가 본격화 됐고 한복판에 그녀가 등장한다.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농에서 교육도 하고 회의도 하면서 전북에서 도의원은 순창에 오은미씨가 출마하고, 나를 정읍시 비례대표로 추천해서 출마하게 됐어요. 비례대표니까 나를 앞세워야 하는 선거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정읍시장(이효신 후보) 선거운동에 힘을 보태고 다녔어요. 다음번 선거에는 다른 분이 출마해서 한 달 동안 선거운동을 다니기도 하고. 그런데 두 번 다 떨어졌어요. 지금 생각하면 짠하죠.”

비록 의회 진출은 좌절됐지만 여성농민회에서 회원들에 의해 후보로 추천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씨의 능력과 열정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선거 이후 그녀는 정읍시 여성농민회 회장을 맡았고, 이어서 전북여농 회장을 맡으면서 농민운동 지도자로 역할하고 있다. 지금은 6살 손녀딸을 봐주고 있는데 손녀딸은 여성농민회의 귀염둥이로 자라고 있다.

“지난번에 여농에서 강원도로 수련회를 가는데 난 손녀 때문에 못 간다고 하니까 이구동성으로 데리고 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같이 갔는데 할머니는 찾지도 않고 이모들을 부르면서 그렇게 잘 놀더라고요. 같이 집회도 가고 회의도 가고 하니까, 이제 여성농민가를 혼자서 불러요.”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에 전념 뜻

올해로 도여농 회장 4년차를 맞아 임기가 끝나가고 있다. 정씨는 앞으로 남들이 하지 않지만 꼭 해야 할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나는 다른 농민단체 활동은 해 본적이 없어요. 오로지 여농 활동만 했거든요. 농협 조합원 가입도 하라고 하는데 안했어요. 다른 맘이 들까봐 그랬었죠. 우리 회원들이 가까운 이웃이고 친한 친구예요. 이제 회장 임기를 마치면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을 하려고 해요.”

정씨는 자기를 앞세우기보다 남을 챙기는 일이 우선이었고, 또 농민운동의 끈을 놓지 않는 정직한 고집을 자긍심으로 삼고 있다. 여성농민가 가사처럼 참세상 농민세상을 만들어가는 당당한 여성농민으로, 세상의 어머니로 살아온 여성농민 정옥련씨는 지금도 억센 세상에 씨 뿌리며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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