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밀수① 궁핍한 시대의 사치-밀수품

  • 입력 2017.10.27 16:05
  • 수정 2017.10.27 16:07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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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외교관이었던 문익점이 몰래 들여온 목화씨야말로 우리나라 최초의 밀수품’이라는 취지의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글쎄, 더 멀리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밀수품이라 부를 만한 품목들이 없지는 않았을 터이니 그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지만, 당시 목화씨는 원나라의 금수품이었으니, 그것을 몰래 들여온 것을 ‘밀수’라 하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이상락 소설가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가 말하는 ‘밀수-밀수품’은 문익점의 시대와는 그 개념부터가 다르다. 단순히 금수품목을 반출하거나 들여오는 것뿐 아니라, 관세청의 공식적인 통관절차를 거치지 않고 몰래 들여오는 모든 상품이 밀수품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곧 밀수행위다.

시절마다 밀수 대상 품목들이 달랐다. 요즘이야 녹용, 보석, 마약, 중국산 농산물 따위의 물품들이 밀수를 단속하는 관세청 직원들의 골머리를 앓게 만든다지만 가령 1970년대에는 화장품, 옷감, 양산 등 지금 생각하면 매우 소박한(?) 것들이 주요 밀수 품목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89년에 와서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고, 또한 국토 분단으로 북방으로의 육로가 막혀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의 밀수행위는 대부분 해상을 통해 이뤄졌다.

16년 전인 2001년 말에 인천세관의 이염휘(1946년생) 당시 조사담당관으로부터 가히 ‘밀수의 모든 것’이라 할 만한 얘기들을 풍성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30여 년 동안 관세청의 조사관으로 활약해온 그의 경험을 좇아서 지난 시절의 밀수품 단속, 혹은 밀수범 검거에 얽힌 사연들을 탐색할 것이다. 문익점 선생의 ‘붓두껍의 목화씨’가, 개발연대의 밀수꾼들에 이르러서는 또 어떻게 진화했을까?

1968년에 재정직 5급 공무원에 합격한 이염휘가, 이듬해인 70년 6월에 발령받아 처음 부임한 곳은 전라남도 여수항에 자리한 여수세관이었다. 당시 여수는 부산, 마산과 더불어 일본을 오가는 선원들에 의한 밀수가 성행하기로 이름난 항구였다. 밀수단속 현장에 출동하던 첫날-.

“어디, 우리 신참이 공부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해보자. 조사요원이 갖춰야 할 자격은?”

“첫째, 세관업무 전반에 통달해야 한다. 둘째, 희생정신이 있어야 한다. 셋째, 순발력과 민첩성이 뛰어나야 한다. 넷째…”

“그만! 다 좋은데, 넌 이름이 문제다. 이, 염, 휘? 이름 부르기가 이렇게 어려워가지고 일촉즉발의 순간에 명령을 빨리빨리 내릴 수가 있겠냐. 어쨌든 너도, 권총 차고 출동해!”

이염휘가 선배 조사관들을 따라 단속에 나선 선박은 일본으로부터 돌아오는 활선어선(活鮮漁船)이었다. 원양에서 잡은 참치 등 활선어를 일본에 수출하고 귀항하는 선박이었는데, 그 배의 선원들이 밀수전과가 있어서 세관 조사관들의 수첩에 요주의 선박으로 이름이 올라 있었다.

드디어 선배 조사관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선장이 느긋한 표정으로 선실 문을 열어주었다. 선실 내부를 둘러본 신참 조사관 이염휘는 화급히 수갑부터 꺼내 들었다.

“깜짝 놀랐지요. 선원들이 버젓이 선실에다 도와루 파운데이션인가 하는 화장품에다, 가죽잠바에다, 양산에다, 커피에다…이런 일제 밀수품들을 태연자약 늘어놓고 있어서 체포를 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조사반장이 이염휘를 말렸다. 물론 불법이었으므로 그 물품들을 일단 유치한 다음, 세관에서 세금을 내고 통관하도록 조치를 해야 했으나 그 양이 썩 많지 않았고, 무엇보다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봐주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단속이 끝난 게 아니었다. 반장이 이물(船首) 쪽으로 걸어가서 닻과 닻줄 사려놓은 걸 옆으로 젖히자, 조사관들 사이에서 비창(秘倉)이라고 불리는 비밀창고가 나타났고, 그 창고의 바닥을 뜯어내자 커피, 양산, 가죽잠바, 화장품 등의 밀수품이 대량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이염휘는 흥분을 감출 수 없더라고 했다. 출동 첫날부터 근사하게 한 건 올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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