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완행열차⑤ 완행열차로 「나」를 보내다  

  • 입력 2017.10.19 21:17
  • 수정 2017.10.19 21:2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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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보내세요』
코레일이 KTX 운행을 시작하면서 내건 슬로건이다. 참 좋은 광고카피다, 생각했다. 
그러나 옛적 개발연대에, 완행열차로, 그것도 설이나 추석 등의 명절 대목에 고향의 식구들에게 ‘나’를 보내는 일은 매우 고단한 여정이었다. 

이상락 소설가

열차표 구하기가 1라운드였다면 진짜 전쟁은 개찰구를 빠져나가면서부터다. 좌석 지정이 안 돼 있는 완행열차의 경우 먼저 앉은 사람이 임자였으므로, 개찰구를 빠져나간 승객들은 전속력으로 승강장으로 내달린다. 하지만 객실 좌석은 재바른 승객들에 의해 삽시간에 점령되고…이제는 자리를 차지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 기차간에 어떻게 ‘나’를 우겨넣느냐가 문제다. 

“안 되겠어. 애는 이쪽으로!”

젊은 여자가 승강장에서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자,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은 남편이 창문으로 아이를 받아 안으로 들인다. 시골에서 기다리고 있을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고 못 살, ‘금쪽같은 내 새끼’의 첫 본향 나들이가 그렇게 별나게 시작된 것이다.
그 사이에도 간단없이 역구내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귀성객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고향에 가져가시는 선물은 내용물을 정리해서 부피를 작게 만들어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복잡한 여행 중에 파손될 염려가 있으니…”

몇 차례 명절 귀성열차에 올라탔다가 영금 본 경험이 있는 나도 물론 그러했지만, 그 시절  서울역이나 용산역에 나온 귀성객의 행색은, 그 치열한 ‘귀성전투’에 임하는 병사(?)의 그것으로는 영 안 맞는 것이었다. ‘네꾸따이’에 정장차림을 한 남자들이야 또 그렇다 쳐도, 물정 모르고 치렁치렁한 한복을 갖춰 입고 나선 여자들의 경우, 밀고 밀리고 하는 사이에 치맛단이 밟히고 브로치가 떨어지는 등 무참하였다. 

그 시절 귀성객이 필수품으로 지참하다시피 했던 선물은 다름 아닌 와이셔츠나 남방셔츠였다. 그땐 그것들을 반드시 종이상자에 넣어서 팔았다. 지금 같으면 내용물을 빼서 가방에 차곡차곡 쟁여 넣으면 간편할 터인데, 그 시절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여섯씩이나 되는 셔츠상자를 굳이 한데 포개서는 끈으로 묶어 들고 나섰다.

그래봤자 승강장에서 ‘승차전투’를 한 판 치르고 나면 셔츠상자가 구겨지고 찢어지고 하여 고향 역에 내렸을 때에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쯤에서 왕년에 용산역장을 지낸 김형배 노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제일 큰 문제가 술병이었어. 아들, 며느리가 모처럼 명절대목에 고향에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 있나 조상님 차례 상에 올릴 술이라도 사들고 나서야지. 대개는 됫병짜리 정종 두 병이야. 그런데 그 정종 두 병이 무사히 고향집 사립 안으로 들어가는 건 드물어. 서울역이나 용산역에서 이리저리 밀리는 와중에 깨져버렸으니까. 그러면 또 유리조각에 다친 사람이 나죽네, 고함을 질러서 역무원들이 비상 출동하고…. 정종이야 고향마을 구멍가게에도 쌔고 쌨는데…”

고향 마을 상점에도 쌔고 쌨는데 왜 굳이 서울에서부터 챙겨들고 나섰을까? 김형배 노인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것이 다 정성이니까 그랬겠지.”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운 가족과의 해후야 누구에겐들 감격적이지 않겠는가. 팍팍한 서울 살이, 그 지친 마음을 매만져줄 사람은 그래도 식구들이다. 하지만 부모에게는 더러 과장도 하고 허풍도 섞어서 나름대로 성공담을 엮어 풀어놓는다. 아니, 실제로 무작정 상경하여 서울에서 소박한 성공을 거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고향의 위로가 필요했다. 고향은 맨주먹으로 상경했다가 넘어지고 깨지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언제든 돌아와 위로받을 수 있는 푸근한 후방기지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나’를 고향에 보내준 완행열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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