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시위에 대한 대처방법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2

  • 입력 2008.05.06 10:05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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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며칠이나 방에서 꼼짝도 안 하고 머 하노? 다른 사람들은 가물어가 물 푼다고 저래 난린데 우리는 안 푸나?”

어머니가 마루 끝에서 한참을 혼잣소리로 무어라 중얼중얼 하시다가 갑자기 목에 힘을 싣는다. 불만이 잔뜩 묻어 있다. ‘며칠이나’가 아니라 고작 하루 반이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겐 나의 두문불출이 ‘며칠’ 만큼이나 긴 조급증과 짜증을 동반했을 것이다. 때를 맞춰 그처럼 자주 비가 내리더니 이번에는 목이 탈 정도로 길게 가문다. 그러니 주위 포도밭에는 물을 대느라고 부산하고 어머니도 덩달아 바빠진 것이다. 풀을 키우는 우리 밭을 풀 한 포기 없는 그들 밭과 마찬가지로 가문 줄 아신다. 그러나 어머니 짜증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일종의 시위다. 나는 그 시위 대처방법을 잘 알고 있다.

중간고사 시험 중인 둘째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어머니의 목소리는 잦아든다. 어머니의 끝없는 ‘중얼거림’을 멈출 수 있는 세상의 유일한 방패는 작은놈뿐이다. 녀석은 제 할머니의 한없이 반복되는 푸념에 이상하리만큼 예민하게 반응한다.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면 그걸 가지고 제법 논리적으로 따지고 안 통하면 신경질을 부린다. 어머니는 나는 만만해도 그런 막내손자에겐 꼼짝도 못 하신다.

어머니의 발소리가 천천히 복숭아밭으로 멀어진다. 해마다 이맘때면 어머니는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운다. 하염없이 혼잣소리를 하고 하염없이 나를 감시감독하며 짜증을 부린다. 복숭아 씨 솎기 때가 돌아온 것이다. 아직 마지막 꽃도 다 지기 전인데도 밭에 나가 부산을 떤다. 굵기가 팥알 정도도 안 되는 것을 너무 일찍 솎아내어 낭패를 본 적도 있어서 아무리 말려도 듣지를 않는다. 힘에 부쳐 잠 속에서도 끙끙 앓으면서 일하러 온 사람들이 혹시라도 게으름을 피울까봐 아득바득 밭마다 따라다니며 솔선수범을 하느라 잠시도 쉬지를 않는다.

등줄기가 당겨 도저히 더 이상 방안에 엎드려 있을 수가 없다. 반바지 차림으로 밭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씨 솎기를 하고 계신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여기저기 몇 나무 꼭대기를 들여다보며 진딧물이 생겼는지를 확인해 보지만 아직은 이르다. 어머니는 나무 아래 펑퍼져 앉아 거친 숨을 고르고 있다. 나는 민망해져서 그런 몸으로 왜 일을 하느냐고 짐짓 짜증을 부리니 심심해서 나왔단다. 심심하면 경로당에나 가시라고 하자 일 놔두고 거긴 왜 가느냐고 역정이시다.

“몸도 그런데 부산 박 서방 집에 가서 한 달만 있다가 오소. 그라믄 일 다 돼 있다.”

은근히 한번 찔러보았더니 발끈 하신다.

“내 집 놔두고 딸네 집에는 와 가노. 차라리 날 까막소에 처넣어라.”

“안 그라믄 손자 밥 해주러 갈란기요? 봄 내내 가고 싶어 하디 마 거기나 가소.”

“마 됐다. 니가 암만 그캐싸도 일 놔두고는 내 어데 몬 간다.”

민들레 홀씨가 자욱하게 날리는 풍경을 아득하게 바라보다가 나는 방으로 돌아온다.

마지막 교정 작업은 지지부진이다. 작년 가을부터 사흘걸이로 전화를 해서 시집을 내자는 제안을 하는 출판사에 3월에야 수락을 했다. 4월 출판 약속으로 원고를 보내고 4월이 다 가도록 두 번째 교정지가 아직도 내 손에 있다. 시집 내는 일을 가을로 미루고 싶은데 출판사 일정상 안 된다고 하니 진퇴양난이다.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자꾸만 담배를 꺼내 문다. 게으른 뻐꾹새가 ‘일 해라’, ‘일 해라’ 하면서 내 귓속으로 꾸역꾸역 하품을 밀어 넣는다. 까무룩 졸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방문 앞에서 시위를 한다.

나는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와 ‘애마’를 몰아 복숭아밭 순례에 나선다. 집 앞밭에는 아직도 많은 꽃이 피어 있다. 개화 시기에는 꽃이 없어 걱정이 많았는데 뒤늦게 꽃이 피는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나 뒤늦게 핀 꽃은 결실이 되더라도 그 물건 돈 되기는 아예 글렀다. 나는 다시 애마를 몰아 복숭아밭 순례에 나선다. 이것만이 어머니의 시위를 잠재우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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