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농활] 수출용 사과, 햇빛을 보아라

  • 입력 2017.10.01 13:08
  • 수정 2017.10.10 12:01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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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한우준 기자]

충청북도 단양의 소백산자락 죽령고개. 이 산골에 1960년대부터 사과를 생산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과수원이 있다. 부모님 윤창길(74)·김춘자(75)씨의 대를 이어 함께 사과 농사를 짓는 젊은 이장, 윤영화 대표의 ‘갑자사과농원’이 내 두 번째 농활 장소가 됐다.

나무에서 사과를 딴 뒤 박스에 모아서 열심히 나르는 일을 상상했던 나는 해야 할 일을 듣고 잠시 어리둥절했다. 한창 수확철인 이 시기 내가 해야 할 일은 사과 따기가 아닌, 사과 봉지 제거다. 과수원에 들어서자 회색빛 열매를 달고 있는 사과나무들이 보였다. 가까이 가보니 재생용지 재질의 종이봉지가 열매를 감싸고 있었다.

“이 봉지 아래쪽을 살짝 찢어서 당기면 반으로 갈라지면서 떨어져 나오죠. 그럼 안쪽 봉지를 살짝 잡고 나머지 반쪽도 벗겨내시면 됩니다.”

윤 대표의 설명대로 두꺼운 종이봉지를 벗겨내자 열매를 감싸고 있는 빨간색의 얇은 봉지가 하나 더 있다. 빨간 속봉지가 온전한 상태로 종이봉지만 벗겨내는 것이 이 일의 핵심이다. 서툰 솜씨에 처음엔 종이봉지를 여러 번 찢어 넝마로 만들다시피 하며 벗겨내고, 속봉지가 같이 찢어지고, 윗부분이 같이 벗겨지고, 진퇴양난이었다. 힘을 너무 주다 아예 가지에서 떨어진 사과와 빨간 봉지 째로 벗겨져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사과도 몇 알 있었음을 이 자리를 통해 고백한다.

윤 대표의 농장에서는 올해 시작한 친환경 사과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사과를 재배한다. 그중에서 대만, 싱가포르 등 사과가 나지 않는 남쪽 지역으로 수출하기 위한 사과들은 이중으로 봉지에 싸여 여름을 난다. 윤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꼭지부분에 기생 하는 벌레들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햇빛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자란 열매는 크기만 커진 채 티 하나 없는 풋풋한 초록색을 띠었다. 봉지를 벗긴 뒤 바닥에 햇빛 반사판을 깔고 일주일만 지나면 일반 사과보다 더욱 선명하고 고르게 물들어 보통 사과보다 보기에 더 예쁘기도 하지만, 실속은 떨어진다.

“받는 쪽에서 이런 걸 원하니까 이 고생을 하지. 값도 그만큼 쳐 주냐고?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좀 덜해. 아마 맛 때문이 아닐까?”

김 할머니는 사과가 햇빛을 많이 보지 못해 아무래도 맛은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처음 설명을 들을 때, 식사시간, 그리고 떠나기 직전을 제외하고는 일하는 내내 노부부의 목소리를 거의 듣지 못했다. 각자 나무를 하나씩 붙들고, 옆구리에 찬 마대자루에 뜯어낸 봉지를 그저 묵묵히 채울 뿐이다. 꼭 봉지 제거가 아니어도 과수원의 일이 대개 그랬을 듯싶었다. 고독과 침묵의 노동을 견뎌왔을 그 세월을 생각하며 존경을 담아 열심히 봉지를 뜯었다.

크기만 하고 하나도 익지 못한 채 모습을 드러낸 사과들 옆엔, 왠지 농업을 하나도 모르면서 기자가 됐다고 농촌에 뛰어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움찔하는 내 마음이 있었다. 어째 그간 짧은 시간 동안 훌륭하게 색이 들지도, 좋은 맛이 담기지도 못한 것 같다고. 농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 더불어 내 자신도 돌아보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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