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춘추] 문화다양성협약과 농민권리선언

  • 입력 2017.09.28 21:55
  • 수정 2017.09.28 21:56
  • 기자명 이해영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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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인권위원회를 중심으로 <농민권리선언>(이하 <선언>)이 논의 중이다. 정식 명칭은 <농민과 농촌노동자 권리 선언>쯤 된다. 수년의 논의를 거쳐 이제는 꽤 진도가 나가 내년쯤에는 선언문 초안 작성이 완료되지 않을까 하는 관측도 나온다.

내용을 살피다 보면 우선 두 가지가 눈길을 끈다. 농민이란 의미로 peasants가 사용되고 있다. 수년 전 한-미 FTA에 반대하는 양국 의원들이 공동선언을 추진하면서 서로 초안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농민이란 의미로 peasants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미국에서 이를 farmers로 바꾸자는 요청이 들어 왔다. 미국에선 이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공동선언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번 UN 선언에선 peasants가 사용되고 있다. farmers가 농장(farm)의 주인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에, peasants를 사용한 이면에는 농민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소농 특히 제3세계의 소농을 주체로 호명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두 번째는 예컨대 문화다양성협약은 협약(convention)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선 선언(declaration)이다. 선진국들의 반대를 의식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용어가 어떠하던 이것이 UN총회를 통과하면 동일한 구속력을 가진다고 봐야 한다.

그간 <선언>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처음엔 반대에서 지금은 기권이다. 전형적인 기회주의적 접근이다. 과거 문화다양성협약 때도 그랬다. 전 세계에서 이 협약에 반대한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전부다. 여기엔 알려지지 않은 비사가 있다. 한국정부도 처음엔 이 두 나라를 따라 반대하다 영화계를 비롯 문화계 전반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이리저리 꼼수를 쓰다 마지못해 찬성했다. 하지만 국회비준동의는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한-EU FTA 추진과정에서 한국 영화계의 강력한 항의를 EU집행위가 받아들여 한국정부를 강하게 압박하면서 결국 비준동의 절차를 밟았다.

현재 발효 중인 문화다양성협약은 미국을 제외한 전세계 문화예술계가 신자유주의와 초국적 자본의 시장독재에 맞서 각 나라의 문화주권을 국제법적인 권리로 확보한 것이다. 문화는 교류의 대상이지 거래의 대상이 아님을 확인한 것이다. 처음엔 문화를 신자유주의적 무역협정의 예외로 하자는 예외주의적 접근에서 출발해, 그 보다 한 단계 높은 다양성(diversity)이라는 인류보편적 가치에 주목해 이의 실현을 담보하자는 쪽으로 나간 셈이다.

이러한 문화다양성협약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나는 ‘농(農)’문제의 한 단계 높은 혹은 좀 더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일국차원을 뛰어 넘어 글로벌차원에서 접근해야함을 말해왔다. 현재의 글로벌경제라는 조건에선 일국 정부가 문제의 실효적 해결을 원한다해도 사실상 가능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번 <선언>은 상당한 진전을 의미한다.

<선언>초안은 전문, I부, II부로 구성돼 있다. I부는 다시 개념정의와 ‘근본원칙’을, II부는 ‘실질적 권리’를 다루는데 총 30여개 조항이다. 내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초안의 제2조 국가의무(states' obligations)조항이다. 예컨대 4항을 보자. “국제협약을 포함한 입법과 정책의 개발 및 이행에 있어 그리고 농민 및 농촌노동자의 권리와 관련된 정책결정에 있어 국가는 반드시(shall) 그들의 대변단체를 포함하여 농민 및 농업노동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사전통고승인(FPIC: free prior informed consent)을 얻어야 한다.” 다음 5조는 이렇다. “국가에 의한 관련 국제협약과 기준의 세부화, 해석 그리고 적용은 국가의 인권상 의무에 부합해야 한다. 이러한 의무는 국제무역, 투자, 재정, 과세, 환경보호, 개발협력 그리고 안전에 관련된 것을 포함한다.”

<선언>은 농민권리에 관련된 국가 의무를 가장 높은 수준의 의무를 표시할 때 사용하는 조동사 shall을 사용, 이를 강행규범으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FTA와 같은 국제협약 체결 시 2007년 <UN선주민 인권선언>에서 채택한 절차규범인 FPIC 적용을 의무화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로선 <선언>이 언제 발효될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수백 개 조항 중 단 2개의 사례가 보여주듯 농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진전임에는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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