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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고추투쟁 승리의 주인공전남 무안 여성농민 고송자씨

아이들이 크면서 중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고송자씨는 어떻게 하면 애들을 도시 학교로 보낼까, 광주에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해 보자는 생각으로 고추를 많이 심었다. 그런데 고추값이 폭락했다. 근당 100원~200원,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받게 된 것이다.

고추농사 망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흉흉하던 차에 농협에서 전량수매를 하겠다면서 조사를 해갔다. 그런데 배정된 수매물량은 달랑 20근뿐. 소문에 의하면 빽 있는 사람은 전량수매를 했단다. 동네 이장은 밤중에 차를 대고 고추를 실어냈다는 소리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잘난 사람만 농협서 고추 사주니 엄마들 불만이 많았어. 억울해서 못살겠더라고. 농협 싣고 가자, 해서 경운기에 고추를 싣고 머리에는 수건 쓰고 농협으로 쳐들어 간 거야. 데모라곤 어디 해봤나. 일찍이 기독교농민회 활동하는 옆 동네 사는 이정옥이라는 분에게 부탁을 했지. 사회 좀 봐 달라고. 내가 현장 발언을 했는데 죽어라 농사지었더니 정부가 사준다고 하더니 누구는 농협이 다 사주고 우리는 안 사주냐고 소리를 쳤어.”

이것이 1988년 고추투쟁의 시발이었다. 고추투쟁은 계획적이거나 의도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농사짓고 열심히 살아가려는 농민들이 하루아침에 생존 위협을 느꼈고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부패가 만든 자연발생적 ‘투쟁’이었다.

전남 무안군 현경면 수양리 마을 여성농민들의 고추투쟁은 승리했다. 결국 정부에서 무안군에 추가 수매물량 22톤을 배정했다. 이 중 12톤은 고씨가 사는 현경면에 배정했다. 그리고 나머지를 10개면에 배정했다.

“12톤이 배정돼서, 면사무소에 가서 우리 동네에 많이 안주면 가만 안 있겠다고 하니까 현경면이 15개 부락인데 우리 동네에 9톤을 줬어.”

고송자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회장이 지난 18일 자택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1988년 고추투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며 무안군에 여성농민회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한 그녀는 농민의 삶 자체가 운동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박토를 일궈 옥토를 만들다

“신안군 신의면이 고향인데 24살에 이곳으로 결혼해서 왔지. 와서 보니, 보리와 유채농사, 고구마 농사를 짓더라고. 지금은 고구마가 고소득 작물이지만 그때는 주정용으로 어쩔 수 없이 짓는 농사였어. 땅이 박토라 다른 농사가 안되니까.”

고씨가 현경면으로 시집을 왔을 때 이곳은 아주 가난한 농촌이었다. 밭은 전부 산을 개간해서 만들어서 척박했다. 그나마 보리를 심어 먹을 수 있는 땅이라야 좋은 땅에 속했다.

“밭이 5,000평 있는데 남편이 산을 전부 삽으로 개간해서 만든 거야. 박토라 다른 농사가 잘 안 돼. 그래도 농사지어 먹고 살아야 하니까 남의 땅을 조금 얻어서 보리를 심었어. 버트지. 올 농사지어서 내년 농사 때까지 먹고살게 부족하더마.”

고구마, 보리농사로는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보리는 양식꺼리고 고구마는 심어봐야 주정용으로 헐값에 팔 수 밖에 없었다. 그것도 중간상인의 농간질로 농민들 생활은 나아질 줄 몰랐다. “고구마 캐면 가마에 담아 양쪽에서 드는 저울로 무게를 다는데 나하고 남편은 키가 작으니까 뭘 갖다 놓고 올라서서 달아서 보내곤 했어. 그렇게 해서 100가마를 보내면 20개, 30개씩 감량을 해서 오는 거야. 너무 속상하더라고. 그런데 한 번은 애들 아빠 친구가 기사로 와서 실어갔는데 그때는 감량은커녕 10가마나 늘어서 왔더라고. 그렇게 횡포가 심했던 거지. 운전기사가 저울질 할 때 농간을 부렸나보더라고. 친구꺼라고 보태서 보낸 거지.”

이 일을 겪으면서 고씨는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만연된 부패가 농민들 삶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훗날 고추투쟁에 나서게 된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어려웠냐면, 아들이 둘 있는데 돌 사진 한 번 찍어준 적 없고, 1학년 때 산 옷은 6학년 때까지 입혔어. 큰 거 사서. 큰애가 중학교 다닐 때 발을 다쳐서 입원을 한 적 있어. 누가 들여다보러 와서 용돈을 줬나봐. 그 돈으로 목발을 짚고 나가서 운동화를 하나 사와서는 그걸 숨겨 놓은 거야. 엄마 아빠가 알면 혼낼까봐. 고등학교 시험 보러 가는데 새 신을 꺼내 신고 나오더라니까. 얼마나 그것이 신고 싶었겠어.”

이 때가 1980년대 후반이다. 국가적으로는 절대빈곤이 사라진 시기지만 고씨를 비롯한 농민들 삶이 나아진 것은 아니다. 척박한 땅에서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은 박토를 옥토로 만들어 특작을 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년 퇴비를 넣어 땅심을 살리는 데 힘썼다.

“보리가 되는 땅이 마늘 양파가 잘 되는데, 우리 땅은 산 땅이라. 농사가 잘 안 돼. 그 땅에 특작물을 심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도 못해. 죽을힘을 다해 거름을 해서 마늘 양파를 심으면 처음엔 자잘한 마늘 양파가 나오는 거야. 그러면 다음해는 퇴비를 더 넣고 더 넣고 하면서 땅심 살리는데 최선을 다했지.”

이런 노력으로 박토는 옥토로 바뀌었다. 애들이 커가고 중학교에 진학할 시기가 되면서 광주에 애들이 기거할 집을 마련할 계획으로 고추를 많이 심었던 것이다. 그 고추값이 폭락했다. 이때가 1988년. 고씨가 억척스런 여성농민에서 여성농민운동가로 성장하는 전환기다.

무안의 대표 작물인 양파를 수확하고 있는 고송자 전 회장. 한승호 기자

고추투쟁에서 여성농민운동가로

1988년 10월 농협에서 고추싸움을 마치고 겨울이 다가오는 데도 고추값은 오를 기미가 없었다. 끝물 고추는 어느 해보다 많이 달려서 고추밭이 붉게 물들었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수확을 포기 해야만 했다. 그러나 고씨는 버리기에는 긴 여름 고생이 너무 억울했다. 고추를 모두 땄다. 너무 많아서 햇볕에 말릴 수가 없어 건조기를 빌려 말려서 쌓아 놓았다. 그리고 12월 5일 무안에서 농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경운기에 고추를 산처럼 싣고 군청으로 향했다.

“또 데모를 한다니까 현경농협에서 고추를 2,000원씩 전량수매 한다고 꼬셨어. 그래서 내가 그랬어. 농협에다가 고추 팔아먹으면 결국 농협 손해보고 그건 다시 농민 손해라고, 농협에 절대 안 팔고 정부에 판다고 말했어.” 동네 부녀회장도 해보지 않았다지만 고씨는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옷 뜨시게 입고 나왔지. 조를 나눠서 번갈아가면서 주먹밥 만들고 된장국 끓여 와서 먹으면서 군청 사무실 하나 차지하고 앉았는데, 경찰서장이 지휘봉을 들고 흔들면서 잡아간다고 협박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꼭 하는 짓거리가 일본 순사 같다, 일본 순사가 칼 들고 위협하는 것하고 똑같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막 야유 보내고. 결국 경찰서장이 도망가 버렸어.”

농민들이 농성을 계속하자 정부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농성 1주일 만에 농협 무안군지부를 통해서 전량 수매하겠다고 발표했다. 군청에 쌓아놓은 고추를 농협군지부로 가져가서 수매하라는 거였다. 그러나 농민은 군청 마당에서 수매하라며 버텼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 경찰은 백골단을 투입했다. “백골단이 아줌마들을 발로 차고, 때리고 해서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도 나왔어. 그러니까 여자들이 더 기가 난거야. 난생처음 경찰서장실에 들어가서 난리쳤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줌마들이 난리치니 잡아 가두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더라고.”

결국 자연스레 군청 마당에서 수매를 했다. 가지고 나온 고추 전량을 팔고 10일 만에 집에 돌아갔다. 무안의 사례는 전국으로 확산돼 전국적인 고추 투쟁을 촉발하게 됐다.

“돈 있어서 옷 좋게 입었겠어, 화장품이 있었겠어. 몸빼에 수건 쓰고 나간거야. 배우고 의식 있어서가 아니라. 삶의 얘기를 꺼낸 거지. 그 생각으로 지금까지 운동하고 살아.”

이후 고씨는 무안군 여성농민회를 조직하며 본격적인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1989년 무안군 여성농민회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여 고추싸움 1주년 기념식도 했다. 경찰이 기념식도 못하게 방해를 했지만 경찰과 싸우고 군청에다 기념식 하게 장소 내 놓으라 싸워서 1주년 기념식을 성사 시켰다. 그리고 의료보험싸움, 수세싸움으로 이어지는 농민투쟁을 함께 하면서 성과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1997년에 전여농 회장을 맞게 되었다.

“김대중정부 때 대통령 만나서 88년 고추싸움할 때 수매가가 2,000원인데 지금도 고추값이 2,500원이다. 농약값 비료값이 얼마나 올랐는데 고추값은 그대로냐고 따지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정말 그러냐고 되묻더라고. 그리고 밭직불금 얘기도 했어. 그랬더니 장관한테 검토해보라고 했는데 그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지.”

전여농 회장 시절 고씨는 대통령에게도 직설적으로 농민들의 현실을 이야기 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격의 없이 고송자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 회장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배석한 장관에게 묻고는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한편 1999년 마늘 파동 때 세이프가드 발동을 끌어내 데에도 고씨가 한몫 했다. 당시 산자부 장관실에 가서 악쓰고 울면서 정부의 대책마련을 촉구했다고 한다.

정치인 고송자

2008년 지방의원 선거에서 고씨는 전남 도의원에 당선됐다. 민주노동당 전남도당에서는 2008년 지방선거에 농민대표를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하기로 하고 고씨에게 도의원 출마를 제안했다.

“당시 전여농 회장이 와서 나보고 도의원 하라는 거야. 공부도 못했고, 농사 밖에 아는 게 없어서 못한다고 했어. 그랬더니 지금 국회의원인 윤소하 의원하고 여럿이 찾아와서 고 회장이 해야 한다고 해서 나섰지. 그런데 들어가서 보고 깜짝 놀랐어. 각종 위원장 선거에 100만~200만원짜리 돈봉투가 오가고 의장선거는 1,000만원씩 돌리고. 그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도청 업무보고 할 때 꼬투리 잡아 지역 예산 따내고 지역에 돈 내려가면 자기가 또 챙기고.”

고송자 의원 눈에 보인 의원들은 자기 이권 챙기기에 급급해 있었다. 민주당 일색의 도의회에서 고 의원의 농민적 의정활동은 악전고투 그 자체였다. F1 경기장 건설 반대, 쌀 경영안정자금 지원 등 각종 현안에 대한 외로운 싸움을 벌여왔다. 결국 예상대로 F1 경기장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고 무용지물이 되었고, 쌀 경영안정자금은 이후 예산이 편성되어 농민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농민 의원으로써 소득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만들어 내는 의정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나 고 의원의 의정활동은 2014년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함으로 4년 만에 막을 내렸다. 농민 입장에서의 의정활동으로 지역에서 확고한 신임을 얻었지만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한 부정적 여론과 상대후보의 금품선거로 198표차로 낙선했다고 한다.

의원직을 그만 두었지만 변한 것은 없다. 농사와 농민운동은 여전히 삶의 전부다. 지난 겨울 촛불집회도 빠짐없이 다녔다. “촛불집회 다니느라 무안농민회는 1,000만원이 넘는 빚을 졌다고 그래. 우리가 그렇게 해서 정권 교체해 주었는데 지들이 잘해서 그런지 알아. 정권 잡았다고 농민들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 마늘 문제로 농림부에 전화했는데 담당과장이 받지도 않는 거야”라며 새 정부의 농정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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