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터

  • 입력 2017.09.10 11:44
  • 수정 2017.09.10 11:46
  • 기자명 부석희(제주시 구좌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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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희(제주시 구좌읍)

살다살다 올 여름만큼 오랜 더위는 처음이었다. 작은 모래사장엔 놀러온 피서객들로 꽉 차 있고 농사용 차, 트랙터가 늘 다니는 마을길엔 그들이 타고 온 차들로 어지럽다. 다들 조심한다고는 하는데 짜증이 나는 건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밭에서 일을 끝내고 땀에 절은 몸을 바닷물에 담는 것을 나는 ‘바닷물 소독’한다고 한다. 몸에 묻은 흙이며 풀에 긁힌 가려움, 농기계에 까진 손이며 다리까지 한꺼번에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하얀 모래 위에 바닷물이 있고 그 위에 떠 있는 나, 밭에서 죽을 둥 살 둥 일을 했던 건 다 잊고 “아이고 좋다” 할 뿐이었는데, 하얀 살들 속에 흙때 묻은 얼굴로 섞이는 게 싫은 것과 자꾸 누군가에게 내몰려진다는 것으로 나에게 그런 여름 바다는 이제 없을 듯하다.

농사를 하면서 나는 너른 땅을 갖고 싶었다. 집을 잘 지어서 식구들은 물론 벗들도 와서 기분좋게 머무르다 갈 수 있게 하겠다고 눈 앞에 일처럼 늘 떠벌리고 다녔다. 넉넉해져야 이룰 수 있는 꿈들, 하지만 농사로 큰 돈 벌기에 이제 틀린 일이다. 번듯한 집은 훗날에나 지어질는지.

가진 터라도 잘 가꾸는 것이 지금 나의 몫이다.

제주의 바뀜은 너무도 빠르다. 투기꾼들이 몇 천 평 농지를 사서 타운하우스다 뭐다 하며 집장사 땅장사로 바쁘다. 많이도 바뀐 지금,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알게 됐다. 땅값이 올라도 좋아할 일이 아니라고, 제주 땅에 더 많은 사람이 오면 큰 일이 날 거라고, 너무 오른 탓에 나는 이제 한 평의 땅도 살 수 없다. 꿈 꿔 왔던 곳에는 집을 짓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우리 마을에서도 카약사업이 들어온다고 한바탕 옥신각신 한 적이 있다. 마을 책임자의 섣부른 결정으로 작은 모래사장을 낀 선창가 주변 사용권을 준다고 해 버린 것이다. 말인즉슨 카약이 들어오면 사람들이 많이 찾고 마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 한다. 급하게 마을회의가 열리고 사업은 못하게 됐다. 좋은 사업이면 마을사람들이 나서서 마을 사업으로 해야지, 돈에 혹해서 사업자에게 마을 터를 내주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들을 모은 것이다. 예전 같으면 큰 건물 지어지고 사업들도 자꾸 들어와야 한다고 했을 어르신들도 이젠 소중한 것들을 자꾸 뺏긴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일도 서로 알아야 하고 책임자의 잘못된 판단과 혼자만의 결정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 준 작은 사건이었다.

해군기지가 들어선 강정마을을 올해도 어김없이 걸었다. 평화를 찾겠다고 터를 잃은 것도 억울한데 구상권 청구니 뭐니 잡혀가고 벌금내고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걸을 수밖에 없다 한다. “각시랑 맨날 싸우지요”라고 강정마을 터줏대감 형님께 농을 걸었다. “우리 각시 정말 착해”, “10년 동안 귤밭 못 돌보고 언제까지 끝날 싸움도 아닌 거라”, “당신은 밖에 일이라도 잘 봄써, 해주니 이 일도 잘 할 수 있는 거지”. 같이 걸어 보지도 못하고 형님의 눈물만 훔쳐보았다.

넘쳐날 것 같은 중국인 관광객을 위해 누구나 비행기로 쉽게 올 수 있는 제주를 위해 신공항 건설은 꼭 해야만 한다고 도지사는 말한다. 중국자본에 땅을 팔고 개발을 해야 제주도가 살아갈 수 있다고 했던 것들이 이제는 웃음거리 짓인 걸 누구나 안다. 중국 관광객이 줄어드니 살 것 같다는 제주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강정에 해군기지가 됐든 성산에 신공항을 만들든 제발 합의보고 합시다. 엉터리로 도장 찍고, 문서로 속이는 일 그만들 하고 다시 묻고 합의하면 제주사람들이 옳은 판단을 할 거다.

농민운동을 한다고 어쩌면 마을에는 소홀했던 게 맞을 것이다. 자기 삶의 터를 지켜내는 일은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가꾸고 지켜왔던 우리의 몫이고 그 보다 더 큰일은 없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남 탓만 하고 살게 될 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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