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차린 밥상 상다리가 부러져도 먹을 게 없어”

이 사람 ㅣ 77세 청년, 순창농민 김광호씨

  • 입력 2017.08.27 17:47
  • 수정 2017.08.27 17:52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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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농촌이 어려운 점은 맨 노인만 산다는 거야. 노령화 돼서 일손이 없어. 인부 사서 농사지어도 소득이 없어. 농산물 가격은 싸지, 인건비는 비싸지 타산이 안 맞는다고. 농촌에 빈집이 많이 생겨, 할머니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자손이 들어와 살아야 하는데 농촌이 돈벌이 되면 올 텐데 농사지어 봤자 손해를 보니 누가 오나. 지난번 국회 토론회에 가서도 이야기 했지만, 헌법에 농산물 가격 보장하게 해야 해. 손해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가격 너무 비싸면 소비자가 어렵고, 너무 싸면 농민이 살기 어려우니까 이걸 국가에서 조정해야 해.”

동네를 가로지르는 큰길 안쪽으로 산 아래로 아늑하게 마을이 들어서 있고 바깥쪽으로 들판이 펼쳐져 있다. 큰길과 들판 사이에 복분자 공판장 건물이 서있다. 이곳이 한때 복분자로 유명했던 곳임을 알려 주고 있다. 동네에 들어서자 김광호씨가 마중을 나왔다. 삼거리 모퉁이에 있는 모정(정자)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김씨가 쏟아낸 이야기다. 한때 젊은이들로 북적였을 이곳도 지금은 쓸쓸히 노인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다. 가끔 지나가는 주민들은 모두가 노인이다.

올해 나이 77세.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6년여 동안 무작정 상경하여 전국을 배회하던 시절을 빼고 나면 온 인생이 이곳 전남 순창군 쌍치면 양신리가 배경이 된다.

“아버지 원래 고향은 담양이야. 제국시대 때 노무자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고 만주로 쫓겨나고 농사지어도 일본 놈들한테 다 뺏기고 그런 시절에 너무 어려워서 고향서 못살고 저 앞에 보이는 산 밑에 골짜기로 이사했어.” 산골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한국전쟁도 보냈다. 한국전쟁 전후에 이곳 쌍치면은 빨치산 세상이었다고 한다. 10살 소년 김광호는 소년 빨치산으로 저녁마다 마을 사람들과 산에 올라가 빨치산 노래를 부르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그 때는 동네 전부가 빨치산 세상이었으니까. 그렇게 했어.” 이후 전쟁이 휩쓸고 가면서 도처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작년까지 민간인 학살 전북대책위원장을 맡아 명예회복, 정부 보상, 추모사업을 벌여왔다.

마을 앞 정자에서 환하게 미소 짓는 김광호(77)씨. 나이가 들어도 꼭 해야 할 옳은 일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는 그는 영원한 ‘청년 농부’다.

무작정 상경한 13살 소년

전쟁이 끝나고 소년 김광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다. 그때 나이가 13살. “광주 송정역까지 걸어서 갔어. 하루를 꼬박 걸어갔지. 광주 송정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간 거야. 아마 그 당시 이 동네에서 서울에 간 사람은 내가 처음일거야. 서울역에 도착하니까 서울은 별천지 같았어. 여기는 전기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밤에 전기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전차도 다니고 큰 건물도 있고. 서울역 앞에 지하도가 있는데 거기에 하숙집이 있었어. 거기 가서 심부름해 주면서 지냈지.”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석유등잔 사랑방에 동네총각 맥 풀렸네

올 가을 풍년가에 장가들려 하였건만

신부감이 서울로 도망갔으니

복돌이도 삼돌이도 단봇짐을 쌌다네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로, 김정애라는 가수가 부른 ‘앵두나무 처녀’이다. 일제시대, 해방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농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배고픔을 벗어날 길 없었다. 그러니 젊은 처녀 총각들이 서울로 단봇짐을 싸들고 떠났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보다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슴에 품고 떠났던 것이다. 소년 김광호 역시 서울의 꿈을 가슴에 안고 집을 나섰다.

집에서 부모님이 말리지 않았냐는 물음에 “아버지가 잘 다녀오라고 하셨지. 하하.” 이렇게 시작한 서울에서 4년을 보냈다.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때로는 보육원에 들어가서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충주로 가서 보육원에 들어가 생활을 하며 충주 교현국민학교에 다녔다. “보육원에서 교현국민학교 6학년에 넣어줬어. 한글도 모르는데 말이야. 나이가 많다고 6학년에 넣어 준거지.” 그러나 충주 생활은 얼마가지 못했다. 충주에서 경상도로 돌아다니다 경주에까지 와서 자리를 잡았다. “충주에 좀 있다가 경주로 갔어. 경주에서는 불국사에서 관광객들 새벽에 토함산으로 안내하는 일을 했지. 이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6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어.”

김씨의 유년시절은 파란만장했다. 어린나이에 격동의 시대를 지내면서 소년 빨치산, 무작정 상경하여 전국을 유랑하면 지냈다. 다시 고향에 돌아온 그는 아버지 농사를 도왔다. “집에 와서 농사지었지. 2년 후 그러니까 21살에 결혼을 했어. 결혼하고도 저 산골마을에서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지었어.” 김씨가 외딴 산골짜기에서 나오게 된 것은 큰애가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 부터다. “거기서는 학교가 너무 멀어 다니기 어려우니까 아버지가 땅 9마지기를 사주시고 나가 살라고 하셨어. 그래서 지금 사는 이곳으로 온 거야.”

손자의 교육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배려로 김씨는 산골짜기 집에서 동네 한복판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김씨는 열심히 농사를 지어 논을 배도 넘게 장만하고 밭도 10마지기나 샀다. 소도 늘려갔다.

“열심히 살았어. 우리 안식구도 일 많이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재산을 늘리게 됐지. 무엇 보다 소가 큰 도움이 되었지. 20여 년 전 동네에서 송아지 자금을 줬어. 절반정도 보조를 해줘서 송아지를 샀는데 가을에 소 값이 급등한 거야. 그러니까 1년 만에 몇 배의 소득이 됐어.”

지난달 18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농정개혁과 개헌’을 주제로 열린 농민 대토론회에서 김광호씨가 청중발언을 통해 농사짓는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한승호 기자

농민운동가 김광호

김씨가 농민운동을 시작한 것은 30년 전 수세싸움을 하게 되면서부터다. “여기 앞에 보이는 들판이 1,300마지기야. 그때 내가 이 1,300마지기의 대의원(농지개량조합 대의원)이었어. 옆 마을 종암리에 가농(가톨릭농민회)이 있었어. 그리고 정읍 태인에 김영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통해서 수세를 안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지.”

1987년 전남 해남에서 개최한 수세폐지 결의대회가 수세폐지운동의 기점이 됐다. 이후 수세폐지운동은 농민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며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당시 순창군 쌍치면에선 김씨가 수세싸움에 불을 지폈다.

그는 동네 사람들에게 수세의 부당함을 설득해서 수세 납부를 거부하게 했다. 어느 날에는 농조 조합장 아들이 수세통지서를 돌리러 다니는 것을 보고 수세통지서를 모두 빼앗아 찢어 버리기도 했다. 농민들이 수세 납부를 거부하자 농조에서는 차압을 붙인다면서 농민들을 겁박하기도 했다.

“수세를 안 내니까 어느 날 옆 동네 시산마을에 농조직원들이 차압 붙이러 온다는 거야. 그래서 순창에 연락하고, 정읍 태인의 김영근씨한테 연락 했지. 그랬더니 태인에서 김영근씨가 먼저 왔어. 김씨가 오자마자 농조 전무 멱살을 잡고 겁을 줬어. 그랬더니 얼굴이 시퍼래져서 도망을 쳤어. 그리고 순창에서 이선영씨하고 김형권씨가 왔어. 동네 비닐하우스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수세 내지 말라고 교육을 했어.”

이 수세 폐지 투쟁은 결국 농민들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된다. 정부는 단보당 30kg씩 받던 수세를 5kg로 낮춰주었으며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폐지됐다.

그는 수세 폐지 운동을 하며 쌍치면에 농민회를 만들어 갔다. “면 농민회를 만들려면 25명의 회원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런데 24명까지는 회원이 확보됐는데 1명이 모자라더라고. 그래서 안식구를 회원으로 가입 시켜서 쌍치면 농민회를 만들었지. 그때가 1988년 8월 4일이야. 순창에서 농민회원들이 버스 한 대를 타고 와서 응원해 줬지.”

그렇게 쌍치면 농민회가 만들어지고 수세투쟁에 이어 고추 투쟁 등 농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농민운동사의 상징적 투쟁이라 할 2.13 여의도 집회에도 참석했다. 이 때 처음으로 농민투쟁에 죽창 등장했다. 순창에서도 죽창을 준비해서 집회에 참석했고 이로 인해 김씨는 순창군농민회 부회장으로 당시 회장인 박재근씨와 함께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1989년 2월 13일 여의도광장(지금의 여의도공원)에서 개최된 농민대회는 고추 전량 수매와 수세폐지를 요구하며 항의하는 농민들 집회로, 농민대회 사상 처음으로 죽창이 등장했다. 이날 왜곡 보도를 일삼는 KBS 방송차가 불에 타는 등 근래에 보기 드문 격렬한 집회였다. 이날 집회에서는 당시 전대협 의장 임종석(현 청와대 비서실장)이 연대 발언을 했고 이 집회로 인해 임종석은 지명 수배됐다.

농민운동을 하면서 김씨는 각종 회의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농민투쟁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열성적인 활동은 동네 사람들도 인정해 줘서 다른 집 일을 하다가도 농민대회가 있으면 다녀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돌아다니니까 안식구가 고생 많이 했지. 논밭 50마지기 농사를 안식구가 다했어. 그래도 불평 한 번 한적 없어. 지금도 어디 간다고 하면 미리 입고 갈 옷을 준비해 놔.”

열정적으로 농민운동을 하면서도 농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일하고, 밤늦게라도 밀린 일을 하면서 가게를 꾸려갔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농민회 일은 빠지지 않고 다닌다고 한다. “농민회 일은 꼭 참석해. 안가면 변절했다고 하니까(웃음). 지난번에도 전주에서 농민회 행사가 있었는데 택시 잡아타고 갔다가 다시 왔어. 몇 사람 만나고 잠깐 얼굴 비추고 왔지. 잠깐이라도 다녀가면 참석한 게 되잖아. 나는 촛불집회도 여러 번 갔어. 동네 사람들도 박근혜 쫓아내야 한다고 말은 하면서 촛불집회는 한 번도 안가더라고. 말로 밥상에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도, 실제로는 먹을 게 없는 거 아녀.” 이제 은퇴 할 만하지만 변함없이 옳은 일에 빠지지 않고 몸소 실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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