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농촌 멧돼지 도시 멧돼지

  • 입력 2017.08.20 11:35
  • 수정 2017.08.20 11:38
  • 기자명 이영수(경북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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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경북 영천)

요즘 농촌에서는 유해조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고라니가 제 집 드나들 듯이 인가에 내려오고, 대낮에도 멧돼지가 도로를 건너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고라니 때문에 콩이며 채소는 심을 엄두를 못 내고 애지중지 키운 과일나무의 새순을 몽땅 갉아먹어버려 고사시키기도 한다.

귀농 초년생들은 고라니며 멧돼지를 원수처럼 이야기하는 농사선배들의 표현에 인상을 찌푸리다 막상 본인들이 당하고 나면 더 흥분해서 난리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농의 꿈을 꾸면서 온갖 교육을 받았을 거고 귀농과정까지 또 얼마나 힘겨웠겠는가? 그렇게 힘든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내 땅을 구해 나무를 심었으니 또 얼마나 밤낮으로 지극정성 돌봤겠는가? 이제 막 피어난 연노란 새순이 내 귀농의 희망이라 여겼을 텐데 하루아침에 고라니라는 놈이 새순을 다 먹어버렸으니 얼마나 허탈하고 속이 상할지 겪어 본 사람들은 그 심정 백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고라니는 멧돼지에 비하면 나름 양반이다. 산속에 먹이가 없어서인지 농촌에는 힘없고 연약한 늙은 사람들만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인지 멧돼지가 거의 매일 저녁 마을을 다녀간다. 그것도 강호동씨만한 어미가 새끼들을 줄줄이 달고 왔다간다.

멧돼지 때문에 고구마 심는 사람이 없어진지는 오래됐고, 요새는 복숭아도 곧잘 따먹는다. 복숭아만 먹으면 그래도 다행인데 이 놈들이 밑에서 먹다가 더 이상 제 키로 안 닿으면 그 육중한 덩치로 나뭇가지에 올라타 가지를 아예 찢어 버린다. 나는 몇 해 전에 그간의 경험과 일본에 몇 번 가서 배운대로 복숭아를 멋지게 키우리라 마음먹고 농장을 새로 만들었다. 갖은 정성을 다 쏟아 3년만에 첫 수확을 하루 앞둔 아침 멧돼지 놈들의 횡포를 목격하고는 눈물을 와락 쏟았다. 땅바닥에는 멧돼지가 먹다 만 벌건 복숭아가 사방에 흩어져있고, 멧돼지들이 올라타 부러진 가지는 시신처럼 누워 있었다. 평소에는 나름 점잖은 축에 드는데 나도 모르게 온갖 욕이 따발총처럼 튀어나왔다. 며칠 뒤 다른 밭에 복숭아 수확을 하러 가니 이번에는 멧돼지가 땅을 온 데 파헤쳐 놓았다. 몇 마리가 왔는지 하루 저녁에 파헤쳐 놓은 땅만 족히 2,000평은 됐다. 지렁이를 먹으려고 파헤친 것인데 수확기에 나무뿌리가 상하면 과일도 문제지만 나무가 죽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면사무소에 연락을 하면 피해상황을 접수하고 대책을 세우고 유해 조수단을 보내겠다지만 세운다는 피해대책도, 온다는 유해조수단도 수년째 감감 무소식이다.

그런데 얼마 전 9시 뉴스에 멧돼지가 도심에 등장해 포털에 실시간 검색 1위를 한 적이 있다.

멧돼지 한 마리가 도심에 내려와 시민들이 몇 시간 동안 공포에 떨었고 경찰과 119가 긴급 출동해 사살했다는 내용이었다. 막걸리 한 잔 하며 뉴스를 같이 보던 동네 형님이 ‘그라문 우리는 맨날 9시 뉴스에 나와야겠네’ 하신다.

농민으로 농촌에서 살기로 한 것은 우리 결정이니 남 탓 할 일은 아니지만, 형평성은 좀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우리도 멧돼지 나타났다고 9시 뉴스에 내보내 달라는 게 아니고 도시민들이 멧돼지가 무서운 것처럼 우리 촌놈들도 멧돼지가 무섭다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촌놈들이라고 타잔처럼 동물들과 다 친구고 멧돼지쯤은 우습게 보는 담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도시 멧돼지는 도심에 나타나기만 해도 9시 뉴스에 나오고, 농촌 멧돼지는 힘없는 노인을 한 명쯤은 죽여야 9시 뉴스에 나오는 것은 멧돼지 입장에서나 사람 입장에서나 형평성에 맞지 않다. 도시 멧돼지는 어쩌다 한 번 나타나 먹다버린 음식물 쓰레기 먹어도 경찰과 119가 맞이하는데, 농촌 멧돼지는 나날이 나타나 탐스런 과일을 배불리 먹고 나무를 부러뜨려도 공무원 한 명 나타나지 않으니 섭섭하다.

부디 농촌 멧돼지도 촌사람들도 형평성 맞게 인정받는, 나라다운 나라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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