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의 후예, 아득한 선배를 찾다

청주시농민회 역사기행 통해 본 농민운동의 의미

  • 입력 2017.08.13 11:32
  • 수정 2017.08.13 16:54
  • 기자명 한우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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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종 고창군농민회장이 청주농민들에게 황토현전승비에 관한 설명을 하고 있다. 탑 인근의 잡초가 무성하다.

지난 8일, 충북 청주시 북이면사무소에 이른 아침부터 한 무리의 인파가 모였다. 청주시농민회(회장 정봉호)가 기획한 ‘동학전적지 역사기행’에 따라나서는 미원면·북이면 중심의 청주 농민 30여명이었다. 기행에 나서는 이유를 묻자 김희상 청주시농민회 사무국장은 “예전부터 직접 방문해 동학농민운동을 돌아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이번에 청주가 폭우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일정을 취소할까 고민도 했지만 오히려 (극복을 위한) 좋은 기회로 생각했고 회원들도 뜻을 모았다”고 밝혔다. 황토현전승비(동학혁명기념탑), 전봉준 장군 고택, 만석보 터, 백산성지 순으로 전적지를 둘러보는 그들의 일정에 동행했다.

이날 방문한 청주 농민들의 안내는 이대종 고창군농민회장이 맡았다. 농민들은 여과 없이 드러나는 그의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깊은 고찰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승비에 새겨진 ‘척양척왜 보국안민’의 ‘보’자에 관한 사실(박정희 정권이 국가 안보를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학정신의 ‘도울 보(輔)’자가 아닌 ‘지킬 보(保)’를 썼다는 일화), 겨우 등장한 전봉준 장군의 후손 덕에 현대에 들어서야 가능했던 고택 복원의 배경, 소규모 봉기를 전국단위 농민운동으로 발전시킨 전봉준 장군의 업적 등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그의 구수한 입담을 통해 쉴 새 없이 전해졌다. 마지막 순서인 백산성지로 향하는 길에 진행된 동학농민운동 정신에 관한 강의는 일부 여성농민들의 눈시울을 자극해 ‘사람들 울리지 좀 마유’하는 항의(?)를 받기도 했다.

“전봉준 장군과 농민군이 우금치로 나아가는 심정이 어땠을까요. 물론 승리해서 한양으로 가는 게 목표였겠지만, 전주성 전투에서 이미 극복할 수 없는 한계를 느낀 바 있기에 그들은 질 수밖에 없는 전쟁에 나간다는 것을 직감했으리라 봅니다.”

농민군이 우금치에서 만난 관군은 신식소총과 야포, 그리고 기관총까지 가진 일본군이 돕고 있었다. 농민군은 주력이 대패를 당하고, 이어 각개격파가 이어지면서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그 모습에서 지난 5·18 때 마지막으로 도청을 사수하던 광주의 시민군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죽을 것을 뻔히 아는 도청 사수, 질 수밖에 없는 투쟁이지만 끝까지 한다. 우리가 아니면 나라를 지킬 사람이 없다는 생각뿐이었던 거죠.”

이 회장은 비록 농민군은 패배했으나, 그렇게 처절하게 패배함으로써 역사가 된 것이라 강론했다. 농민들의 투쟁은 비록 막을 내렸지만 이것이 일제하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졌고, 면면히 우리의 역사를 지하수처럼 흘러서 지금까지 내려왔다는 말을 끝으로 그는 강의를 마쳤다.

전지현·김명지 부부는 “여기에 오면 늘 큰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든다”며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고 우리 역사에서 나라를 지켜냈던 것은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이날 방문한 동학농민운동 유적지 일부는 지자체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 안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 고택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관리가 이뤄지고 있는 듯 했다. 반면 황토현전승탑은 동학농민혁명기념관과 접하고 있음에도 잡초가 무성한데다 곳곳의 칠이 벗겨져 있었고, 외진 곳에 위치한 백산성지의 경우 오르는 돌계단이 정강이까지 오는 풀로 뒤덮여 발목과 다리가 드러난 농민들을 괴롭혔다.

농민들이 누군가, 2년 내내 제초만 한다는 군인도 당해내지 못할 풀매기의 대가들이 아니던가. 농민 서찬석씨는 “우리 농민들은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라며 “초봄하고 추석 때쯤, 1년에 두 번만 관리해줘도 이 지경으로 풀이 자라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농민 전태천씨는 유적지의 실태를 목격할 때마다 관할 지자체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정읍시 공무원으로부터 ‘시정하겠다’는 답변을 들은 그는(부안군에서는 결국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농민 정신이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며 애석해했다. 

‘고부봉기’의 발단이 된 만석보 터를 방문한 청주 농민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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