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라고 읽으면 ‘까시’에 찔린다

이중기의 농사이야기 - 31

  • 입력 2008.04.28 02:08
  • 기자명 이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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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 2시가 후딱 지나가려 하고 있습니다. 담배를 피워 물고 무심코 시선을 던졌는데 큼지막한 글씨가 박힌 농협 달력에 가 닿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오늘이 마감 날입니다. 내일, 26일 심포지엄 때문에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깜빡했던 모양입니다. 자주 농사꾼이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은 생각에 망연하게 앉아 있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사꽃 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안타까워하기만 했지요. 초록은 백두산을 향해 북상하면서 더욱 짙어지고 바쁜 시절은 다가옵니다.

사실 이번 주에는 미국 쇠고기 때문에 한숨만 푹푹 나오는 영천 우시장에 한번 가보고 글을 쓴다는 것이 바쁜 핑계로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끝에 서재에서 책 한 권을 뽑아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작고한 경제학자 정운영 선생의 1989년 판 『광대의 경제학』입니다. 선생은 경제학자로써 농촌문제에도 꽤 많은 글을 쓰기도 했었는데 그 몇 토막을 소개하는 것으로 저의 게으름에 대한 채찍으로 삼겠습니다. 1988년에 쓴 〈안동 기행〉 이라는 이 글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선생의 글은 아직도 우리 농업과 농촌과 농민들에게는 유효하고 상징적입니다.

“정 선생, ‘꼬추’라고 한번 써보소.”

“예?”

“아, 우리가 양념으로 쓰는 채소 안 있소? 그걸 우리 글로 써보라니까”

말 속에 무슨 뜻이 담겨 있으리라는 집작은 했지만, 여하튼 나는 아는 대로 ‘고추’라고 쓸 수밖에 없었다.

“정 선생도 수입고추만 먹는 모양이구려. 한번이라도 ‘꼬추’모를 땅에 꽂아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냥 ‘고추’라고 읽을 수가 없지요.”

고추에 사무친 농민들의 그 간절한 ‘원과 한’을 잠시만이라도 생각한다면 그것을 결코 ‘고추’라는 ‘부드러운’ 말로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번에는 또 ‘까시’에 걸렸다.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대로 정직하게 ‘가시’라고 써냈지만, 그 분은 다시 “한번이라도 ‘까시’에 찔리는 고통을 당해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시’라고 쓸 수 없는 법이제” 하고 일러주었다.

담소 중의 한바탕의 재담으로 돌리기에는 그 내용과 의미가 너무 무거웠다. 특히 ‘미친’ 역사가 할퀴고 지나간 한때의 상처로 인해 그 장구한 회한의 세월을 흙 속에 묻고 있다는 그 J선생님의 과거를 얼핏 들은 적이 있기에 그 말씀은 독한 담배연기처럼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 척박한 토지에서 벗어나 출세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닦은 ‘선비의 학문’에 못지않게 그 메마른 흙을 가꾸며 줄기차게 싸워온 ‘민중의 삶’이 보다 값진 게 아니냐는 어느 참석자 한 분의 지적에, 이 고장이 낸 인물을 찾기 위해 전 날 밤 퇴계와 서애의 행적을 백과사전에서 더듬었던 ‘먹물’의 옹졸한 발상을 크게 후회했다.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발음을 하면 ‘니 맛도 네 맛’도 없어지고 어린 날의 향수도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그렇듯이 고추도 ‘꼬추’라고 발음해야 다감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고추’라고 말하면 책상물림이란 느낌이 들고 이질적입니다. 그래서 ‘고추’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그만 ‘까시’에 찔릴 것 같습니다.

위 글에서의 J선생님은 아마도 경북 봉화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약초 캐는 재미로 산도 잘 탔던 전우익 선생이 아닌가 합니다. 그럴 것입니다.

파란만장의 생, 전우익 선생님.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 기자를 하다 체포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88년까지 봉화에서 ‘주거제한’으로 묶여 살면서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사람이 뭔데』등 세 권의 책을 쓰시면서 치열하게 사시다 2005년에 돌아가신 그 분의 얼굴이 문득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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