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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는] 라면⑤ 라면? 어느 포목점에서 팔아요?
이상락 소설가

1963년 가을에 처음으로 라면이 생산되었다. 그러나 모든 과정이 자동화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 지금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가령 반죽 통에 밀가루를 일일이 삽으로 퍼 넣어야 하는 등, 공정마다 적잖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야 했다.

하지만 노동력이라면 걱정할 것이 없었다. 처음 하월곡동에 공장을 차렸을 때는 물론이고 1967년에 도봉동으로 이전했을 때에도 라면공장 직공으로 들어가기 위한 경쟁이 열을 뿜었다.

그 무렵 도봉동에는 도심개발로 밀려난 철거민들이 무수히 몰려들었고, 거기 더하여 수재와 화재 때문에 거처를 잃은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여기저기 천막을 짓는 바람에, 그 지역 일대가 거대한 이재민 수용소였다. 노무 담당자가 사장실로 달려왔다.

“라면공장 직공 5백 명을 뽑는다는 광고지를 거리에 붙였더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합니다. 무슨 대책을 세워야겠어요.”

“그래, 대책을 세워야지. 이건 국가에서 정리해 줘야 할 일이야.”

개인 회사의 직원 뽑는 일을 국가가 맡아 해줘야 한다는 것은 무슨 얘길까?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해결이 되었다. 전중윤 사장은 경찰 관계자와 협의하여, 천막촌 빈민들을 대상으로 남녀 구분 없이 한 가구에 한 명씩만을 선정해서 뽑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에는 아예 경찰서에서 뽑은 인원을 파출소 순경이 인솔해서 삼양라면 공장으로 데리고 왔다.

새로 들어온 직공들은 일단 위생이 문제였으므로 들어오자마자 칸칸이 마련된 목욕시설에 들어가 씻게 하고, 옷과 신발까지 새로 지급을 해서 생산현장에 투입했다. 많을 때는 공장 직공이 2천여 명에 이르렀다 하니, ‘전중윤과 삼양라면’이 국가에서 해야 할 빈민구휼의 역할을 상당부분 담당했다 해서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월곡동에서 공장을 가동했던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라면을 튀길 때 사용하는 기름이었다. 한 봉지 분량씩의 국수가 잘라져서, 라면 한 개 크기의 납형(蠟型)에 담긴 다음, 팔팔 끓는 기름 가마에 들어가서 튀겨지는데, 그 기름을 충당하는 것이 여간한 애로가 아니었다.

“마장동 도살장에서 소기름이나 돼지기름을 구해다가 가마솥에 끓인 다음 그걸 짜가지고 튀김장치에 넣어 사용했는데, 얼마 안 가서 굳어버려요. 그래도 소기름은 돼지기름보다는 오래갔지만, 근본적으로는 정제시설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요.”

소 잡을 때 나오는 허연 기름덩이를, 탈취-탈산(脫酸)-탈색(너무 색이 누러니까)의 과정을 거쳐 정제를 해야 국수 튀김용 기름으로 제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으로부터 정제한 소기름을 드럼통 단위로 수입해다 씀으로써 문제가 해결되었다.

라면 생산이 본궤도에 올랐으나 사람들은 도무지 라면 사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니, 숫제 라면이 무엇인지를 도통 몰랐다. 궁리 끝에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김 과장, 하늘에다 풍선을 띄워서 우리 라면을 선전해 보자구!”

종로구 관철동 상공에 대형 풍선을 띄웠다. 전중윤 회장은 자신이 한국 최초로 애드벌룬을 상품 선전에 이용한 사람이라며 껄껄 웃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영 아니었다. 반응이 이랬다.

“삼양라면…? 그거 어느 포목점에 가면 구입할 수 있어요?”

육칠십 년대에 시골 읍내에만 나가도 즐비하게 도열해 있던 상점들이 바로 ‘○○라사(羅紗)’라는 옷감 가게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새로 나온 옷감, 즉 ‘라면(羅綿)’쯤으로 알았던 것이다. 난감해진 전중윤은 직원들을 서울역이며 시내 극장으로 데리고 다니며 한 봉지씩 공짜로 나눠주며 선전을 했다. 라면은 옷감이 아니라 새로 나온 먹을거리라고.

라면이 우리 식생활에 당당한 먹을거리로 등장하는 과정에 그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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