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라면 - ④ 허허벌판에 라면 공장을 차리다

  • 입력 2017.08.04 15:45
  • 수정 2017.08.06 19:41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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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우리 회사에서 납품받는 것처럼 내가 기계 발주를 해서, 한국의 당신네 공장에다 설치해줄 테니까, 당신은 내일부터 우리 라면공장에 출근해서 제조 공정을 익히세요.”

처음엔 기계를 구입하는 일만 도와주겠다던 ‘묘조(明星)라면’ 사장 고쿠이가 자기네 회사 기술자를 한국에 보내서 설치까지 해주는 것은 물론, 전중윤에게 라면공장을 개방하여 공정을 배우도록 배려하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전중윤과 재일 실업인 김평진의 끈질긴 설득을 받아들인 것이다. 고쿠이가 이렇듯 도움을 주기로 한 것은, 그가 6.25 전쟁 때 군수품 조달사업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는, 일말의 부채감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중윤은 공장으로 출근을 하게 됐다는데, 보험회사를 운영하던 사람이 식품 만드는 기술을 단기간에 익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주일 동안 여관에서 자면서 매일 공장으로 출근을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전연 가르쳐 주질 않아. 하지만 사장이 구경은 맘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이리저리 휘젓고 다니며 관찰을 했지. 처음 소맥분을 쏟아 넣는 과정에서부터 반죽을 하고, 국수가 뽑혀 나오고, 그 국수를 꼬불꼬불하게 만든 다음 일정한 길이만큼 커트를 하고…제조공정을 죽 보면서 내 나름으로 수첩에다 그림도 그려가면서 단계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도 체크하고…. 그걸 몇 십 번을 했어요.”

당시 묘조라면의 무게는 85그램이었는데 전중윤은 자신이 한국에 돌아가서 생산할 라면의 중량을 100그램으로 미리 정했다. 그 시절 한국인은 너무 굶주려 있었으므로 양을 더 늘리기로 한 것이다. 거기에 스프 20그램을 더해서 120그램짜리 봉지라면을 생산하기로 잠정적으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다른 기술이야 제조공정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직접 만드는 과정에 참여도 해서 익힐 수가 있었으나, 문제는 스프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애당초 완성품으로 나온 스프를 갖다가 포장 공정에서 투입을 했기 때문에, 어떤 원료가 들어가고 그 배합비율이 어떻게 되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프 만드는 기술을 못 배워 오면, 용 그림을 그려놓고 눈을 못 그린 셈이잖아요. 그렇다고 라면 제조 기술을 무상으로 전수받은 처지에, 왜 스프 기술은 안 가르쳐 주느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요. 그래서 포기했어요. 까짓것, 된장 가루를 빻아서 만들든 멸치가루를 넣어서 만들든 고거 하나 못 만들 줄 알고, 하는 오기도 생겼고.”

드디어 기계설비에 대한 계약을 다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네다 공항에서 여객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비행기 출발 10여 분 전에 묘조라면의 하시모토 상무가 공항으로 허겁지겁 달려왔다.

“저희 사장님이 갖다 드리라고 해서…”

서류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스프 제조 비법을 설명하는 문서였다. 미리 가르쳐 주면 그 기밀이 다른 이들에게 탄로 날까 봐서 이제야 주는 것이라 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서 라면을 만들어 공급할 일만 남은 셈이다. 물론 차질 없이 라면공장을 제대로 가동을 할 수만 있다면.

전중윤은 고쿠이 사장의 주선으로 기계 설비를 싼 값에 구입했으므로, 남은 1만 달러를 정부에 반납했다. 그 1만 달러로 다른 제품을 구입해서 한국에 내다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부추기는 고쿠이의 유혹을 뿌리친 것이다.

성북구 하월곡동, 그러니까 지금 삼양식품 본사건물 자리가 예전에는 허허벌판이었는데, 그 곳에 라면공장이 들어섰다. 처음 150여 명의 생산직 사원을 모집했는데, 밥벌이할 자리가 태부족하던 시절인지라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1963년 9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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