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훈의 농사직썰]사람이 기본이 되는 따뜻한 학문

한국 농업경제학이 나아갈 길

  • 입력 2017.08.04 15:31
  • 수정 2017.08.07 11:01
  • 기자명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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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 농업 농촌 농민의 현주소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신세이다. 믿었던 촛불혁명의 총아 문재인정부의 농정마저 속된 표현으로 싹수가 노랗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선 때의 농정공약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발표된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서는 슬그머니 사라지거나 퇴색해 버렸다. 농업과 농촌 농민 정책 분야의 공약이 잘 보이지 않고 특히 소비자 국민의 안전한 먹거리의 안정적 조달방안에 대한 공약도 내쳐버렸다. 기껏해야 해마다 외미가 과잉 도입돼 발생한 국내 쌀값 안정을 위해 쌀 재배면적을 대폭 줄인다는 정책이다.

농민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민 문제 해결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 농업의 붕괴는 시간문제다. 농업경제학은 바로 경세학, 세상을 구하고 사람이 기본이 되는 학문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사면초가에 빠진 농업 농촌 농민을 위해 이 나라의 농업경제학자가 해야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사진은 써레질을 하며 밝게 웃는 농민들의 모습. 한승호 기자

시장경제, 윤리·도덕이 수반돼야

우리 식량과 농업은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 아래 시장이 완전 개방되면서 몰락에 몰락을 거듭하고 정부와 언론의 무관심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24%의 자급수준에서 76%의 부족량을 유전자조작식품(GMO)을 비롯 제초제, 살충제 투성이의 외국산으로 국민 식탁의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

그와 같은 현상은 그간의 대기업 자본의 로비와 영향력에 좌우되는 정치에 그 주된 책임이 있지만, 이를 묵인 내지 방조한 언론과 학계에도 원천적으로 책임이 없다고 말 할 수 없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다시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길을 찾아 내려오라는 말이 있다. 길이 처음 시작한 정상에서 시냇물 소리를 따라 내려오는 것이 평지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범위를 좁혀 필자가 몸담고 밥 벌어 먹고 살아온 우리 농업경제학계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잠시 고민해 보고자 한다.

그동안 우리 농업경제학계는 6.25 이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학자들을 주축으로 경제현상을 분석하거나 경제정책을 제시함에 있어서 산업적인 측면에서 농업문제를 지나치게 효율성과 생산성 등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가격경쟁력 찾기에 몰입한 나머지, 불완전한 데이터에 의존한 계량경제학적 분석모델로 해답을 구하고 처방해 왔다. 가족농의 중요성과 농업의 공익적 가치 그리고 품질 경쟁력과 안전성 경쟁력은 도외시 됐다.

자유주의 시장경제학은 그 근원이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라고 말하지만, 실제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 보다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1759, 한국판 1996)’에 더 심혈을 쏟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현대 경제학자교수들이 간과해 왔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 앞서 출간한 이 책에서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윤리와 도덕이 수반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사회발전과 상호 협조관계에 관한 지식이 있어야 하며, 경제주체 간 신뢰와 협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주체간의 ‘신뢰’라고 말한다. 이런 요소들, 이른바 도덕감정론의 중요성에 대하여는 우리 경제학 연구와 교과서들이 전혀 또는 거의 가르치지 않거나 취급하지 않고 있다. 실제 경제현상 분석에서는 필수불가결한데도 그러했다.

다른 한편, 한국의 경제학, 특히 농업경제학과 통계학, 계량경제학을 포함한 경제학계의 태두로 추앙받는 故 김준보(金俊輔) 선생은 그의 명저, 농업경제학 서설(고려대, 1967)에서 아시아적 소농국가에서의 농업 농촌 농민 문제는 자연적, 기술적 제약성 주제와는 별도로, 자본주의적인 지배조건과 피지배조건, 즉 한국적 소농관계를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그 본질을 분석해내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당면한 농업 농촌 농민 문제를 푸는 키 중에 마스터 키는 대자본의 횡포에 맞서 경제 구성체 간의 ‘신뢰와 상호협력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적 시장경제 원리의 작동’이라고 해제해 본다.

진리는 따뜻한 가슴을 가질 때 발견

‘따뜻한 심장에 냉철한 이성’을 말한 ‘알프레드 마샬’은 어떻게 인간을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전쟁과 같은 인류의 모든 해악의 근원이 빈곤문제라고 진단하고 인류의 빈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학을 연구하게 됐다. 그리고 빈곤문제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본격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학자가 다름 아닌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아담 스미스는 생산력의 증대가 곧 국부를 가져오고 빈곤은 자동적으로 없어질 것이라는 나이브(순진)한 결론에 도달한다. 특이하게도 소농문제, 특히 아시아적 소농경제에 있어 자본주의적 지배조건과 소농이라는 피지배조건을 분석의 새로운 틀과 조건, 비전으로 제시한 학자가 다름 아닌 초대 한국농업경제학회 회장이셨던 김준보 교수였다.

경제를 연구하는 뚜렷한 목적의식, 즉 철학이 부재한 기계론적인 분석은 선비정신의 경제학자가 할 짓이 아니다. 적어도, 앞서 인용한 동서양의 세 분 석학들은 “진리는 바로 따뜻한 가슴(Warm heart)과 냉철한 두뇌(Cool head)를 가질 때 보여지고 찾아진다”는 신념으로 인간 중심의 경제학을 표방했다.

농민의 어려운 현실을 외면하거나 따뜻한 가슴이 없는 농업 농촌 연구를 한다면 이는 장사꾼이나 다름없는 연구용역업자이지 선비형 농업경제학자의 도리가 아니라고 강조하셨다. 다만, 막스 베버가 학문 연구에 있어 가치를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몰가치론(沒價値論)’을 편 것은 실증학적인 ‘연구방법론의 불편부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지, 정책연구의 목적과 의지를 꺾으려 함이 아니다.

농업경제학, 농민과 사람 살리는 학문이어야

요컨대, 농업 농촌 경제 연구의 시작은 농민과 백성을 살리는 목적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경세유표’ 등 방대한 정책연구를 통해 ‘경세학(세상을 구하는 학문)’이라고 불렀다. 한국, 미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농업경제학 연구는 적어도 경세학(經世學)의 웅지를 품을 수 있어야 한다.

현대경제학은 초기 경제학 태동기 이후 사회가 발전하면서 그 한 부분이었던 역사학 사회학 철학 정책학 등 여러 학제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부분학문으로의 기능에 안주해 왔다.

시장경제 원리가 100% 가동된다고 가상한 일부 미국식 경제모델에서나 통하던 계량경제학 방법론을 역사와 문화·전통과 자본주의적 지배조건 및 정치요인 등에 크게 영향을 받는 한국의 농촌경제에 직접 응용하는 것은 시작부터 오류를 내포했다. 우리는 3농 문제를 푸는데 있어 너무나 오래 정치·사회·문화·역사적인 요소들을 그동안 고려대상에서 잊어왔고 빠뜨려 왔다. 학계 스스로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 하고 자기합리화 해오지 않았던가.

적어도 한국농업경제학 출범 초기 김준보 선생 시기의 농업경제연구는 이 점을 항상 유념하면서 농촌현장에서 농업 농촌 농민 문제와 그 해답을 찾으려 동분서주했었다. 영혼도 있고 피와 살도 있는 경제주체들이 오직 가격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는다고 가정하고 분석하는 신고전학파의 경제학 모델은 그래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접근방식은 현실세계에서 종종 현학성을 과시하지만 결코 살아 숨쉬는 해답을 찾는 과학적인 학문이 되지 못한다.

우리나라의 특수한 형태의 가족농(소농)체제의 현실에 미국식 경제학의 부분적 접근 방법과 신고전학파류의 대안들이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수많은 정책 대안들의 하나일 뿐이다. 예를 들어 GDP로 환산한 우리의 국력이 세계 11위라고 하는데, 이것에 오버랩하여 국민 15%를 차지하는 716만 명의 빈곤층이 존재하고 있다면 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GDP가 올라가면 빈곤층 또한 더욱 빠르게 증가하는 역설적인 경제현상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흔히 목격하는 고용불임(不姙)의 경제성장과 고용불임의 수출액 증가 현상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 대한민국의 땅값이 오르고 공시지가가 높아지는 곳에 국민의 5%가 전체 가용토지의 83%를 과다히 소유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바야흐로 세계 12위 무역대국이라는 대한민국의 환경지속가능성 지수가 세계 최하위급 136위라는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가도 겸허히 분석해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산업간 지역간 계층간 양극화 현상들이 심화되고 있는 현상을 분석 예측 진단하지 못한다면 확실히 현대 우리의 경제학은 전환기, 또는 혼란기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농업 부문에만 한정해 볼 때 더욱 모순투성이다.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최근 절대농지에 대한 비농민들의 무제한 소유를 허용하고 농지를 다른 용도로 자유롭게 전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그 결과 1949~50년 농지개혁 당시의 수준으로 현재 전국 농지의 6~7할이 부재지주 또는 투기적 자본의 소유로 넘어가 있다.

다만 우리나라 ‘농림축산식품 주요 통계’ 에서는 토지소유 통계가 언제부터인지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경자유전의 원칙과 소작금지’ 조항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고서 우리는 어떻게 농업의 다양한 공익적 기능(Multi-functionality)을 주장할 수 있을까. 식량자급률이 24%에 머물며, 식용 GMO(유전자조작식품) 수입량이 세계 제1위를 기록하면서 우리 농업경제학자들은 국민의 식생활 안전성과 안정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이런 것들은 경제학적인 방법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치의 문제이며 사회학과 철학적인 방법이 함께 동원돼야 한다. 지금 개별학자들은 선비형과 장사꾼형으로 구분되어 각자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길만 따르면 되는가 고민하고 있다. 사람들이 왜 경제학을 암울한 학문(Gloomy Science)이라 부르는지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사람이 기본이 되는 따뜻한 학문’으로

이런 다원적인 사고방식을 전제한 경세학(經世學)이 전환기 농업경제학에서 다시 시작해야 할 출발점임을 뜻한다. 사람(농민)을 살리기 위해 사람 문제 해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농촌·농업의 붕괴는 시간문제이다.

시장 수요공급 및 가격원리가 100% 적용이 되지 않는 경제학의 사각지대가 다름 아닌 우리의 소농 부문, 농촌 부문에 상당히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소농경제하의 농업이 이익을 내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삶 자체이며 삶의 한 방식이라는 인식이 전제돼야 한다.

경제 분석의 사각지대에서 우리가 대처할 방법은 ‘사람이 기본이 되는 따뜻한 학문’을 가지는 것이다. 애정과 정열을 가질 때에야 비로소 한국적 3농의 문제가 보일 수 있다. 특히 농업·농촌 부문에서는 그 유명한 정치경제학 명제인 J. 롤즈의 ‘최약자 보호원칙’이라든지 J.R. 힉스의 ‘보상의 원칙’들이 널리 준용돼야 한다. 한국적 소농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롤즈와 힉스의 처방이 전혀 생경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 농촌의 문제와 미래는 열정과 애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 사실을 연구자들이 염두에 두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연구에 임해야 할 것 같다. 신고전학파적, 신자유주의적 농업경제학의 사각지대를 심도있게 인식하고 다시 산 정상에 올라가서 길을 찾아 내려가야 할 것 같다. 아마도 그 길은 현대 독일 등 북구라파 사회에 풍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지면의 제약상 다음 기회에 토론하고자 한다.

(이 글의 골격은 필자의 지난 7월 6일 한국농업경제학회(회장 한두봉 고려대 교수) 창립 60주년 기념 기조연설문에서 원용했음을 밝힌다.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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