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허장성세(虛張聲勢)

  • 입력 2017.08.04 14:52
  • 수정 2017.08.04 14:57
  • 기자명 최용혁(충남 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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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충남 서천)

연일 계속된 비 때문일까, 골골이 꽉 찬 벼 포기들을 보며 장한 생각 보다는 내심 걱정이 앞선다. 지난 봄, 절제하지 못한 비료 한두 포대가 못내 찜찜한 것이다. 작년 가을, 수렁 논 자리가 엎치는 바람에 바심하면서 때 아닌 게거품을 물며 다짐하고 다짐했었다. ‘논 한 필지당 비료 두 포대씩 절감!’ 나락 값이 10만원 언저리를 헤매는 동안에 다시 한 번 굳게 맹세했었다. ‘나락 조금 더 먹을라고 발버둥칠 거 없다. 그냥저냥 마음이나 편하게 농사짓자.’

봄기운이라는 것이 처녀들 마음도 뒤숭숭하게 만든다지만, 농사꾼 마음에도 억누르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뭔가 솟구치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지난해의 다짐이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작년에도 크게 나쁘진 않았고…, 나락 조금 더 나면 애들 아이스크림이라도 한 번 더 사주고…’ 하는 생각이 비실비실 끼어들면서 그만, 참고자 했던 비료 한두 포대를 같이 쏟아 부은 것이다. 어쩌면 새 봄이 주는 쌉쌀한 희망 같은 것에 기대어 오히려 작년보다 한 포대를 더 줬는지도 모르겠다. ‘돈으로 쳐도 겨우 몇만원이고, 질소질로 따지면 거, 몇 프로나 더 되겠어’ 하면서 솟구치는 봄기운에 정신을 통째로 맡겼나보다. 잘 아시다시피 희망은 그런 식으로 오는 게 아니었지만. 순전히 봄 때문이다.

무성하게 뻗은 볏이파리들이 모두 다 알곡을 배지는 못할 것이다. 되레 숨 쉴 공기를 다투다 제풀에 처질 것이고 늦게 나와 헛이파리가 될 놈들조차 한세상 보겠다고 방정떨다 모양만 우스워질 것이다. 기껏해야 쭉정이 몇 알 맺힐테지. 타고난 팔자보다 더 무성해진 것들에게는 더 많은 균과 충이 달려들 것이다. “왜 우릴 무시했어?” 아직도 벼가 새끼를 칠 거라고 생각한다던가 이제 막 기어 나오는 이파리들이 이삭을 밸 거라고 생각하는 농민이 있다면 바보일 테니, 제 몫을 비껴난 결과들은 미필적 고의라 할 수 있겠다. 과실에 비해 처벌이 상당히 무겁다.

병아리 100마리만 풀어 놓을 공간에 120마리를 풀어 놓으면서 재앙은 시작된다. 까짓 비료 한두 포대, 까짓 병아리 한 이십 마리에서 재앙은 희망과 함께 자란다. 봄기운이 과하게 뻗치는 것을 잘 다스려야 했었다. 이제라도 논을 잘 말려 뿌리가 더 깊어지도록 하던지, 농약을 쓰던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 눈에 훤히 보이는 벼 포기가 아니라 그 밑을 떠받치는 뿌리라든지, 벼 포기 사이를 순환하는 공기라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더 집중해야 한다.

‘내 인생의 줄기에도 쓸데없이 무성한 이파리들이 많다’는 걸 봄이 다 지나고 느낀다. 과한 것은 무엇인지, 지금이라도 자르고 쳐 낼 수 있는지, 약이나 논물 말리는 것 정도로 해결할 수 있는지 살펴야 한다. 늦지 않았을까.

다만, 엉뚱한 핑계를 하나 대자면, 초초고령화 동네에 살고 있고, 그 동네 회관에 가면 날마다 윷노는 할매들이 있고, 볼 때마다 ‘한창때다, 애들이다, 젊어 좋겠다’ 하는 말들 때문인데, 정작 “아빠, 동네 아저씨들하고 청년회 모임하러 간다”고 하면 박장대소를 하며 떼굴떼굴 구르는 중학생 딸들의 비웃음속에 담긴 의미를 일찍 간파해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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