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고랑 한숨 묻고 관광버스에 올라…

  • 입력 2007.02.01 00:00
  • 기자명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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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에 사는 사람이면 일년에 두세번은 관광버스를 타기 마련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마다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바닷가로 떠나기도 하고, 이런 단체 저런 모임에서 내용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은 제목으로 관광버스를 태우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아주머니들과 관광버스 이야기는 좀 해야겠습니다.
아직 안개로 걷히지 않는 이른 아침부터 관광버스는 회관 앞에서 흰 연기를 부릉거리며 서 있고, 맘 급하신 어르신과 이장님은 그 연기와 경쟁이라도 하듯이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버스 꽁무니에 둘러 앉아 왁자지껄합니다.

가을 가뭄에 대해서, 각자의 소출에 대해서, 농협 쌀금에 대해서, 누구네 술먹고 자빠진 일에 대해서, 건너마을 노총각 약 먹고 엎어진 얘기까지 대동일년사 총결산을 하고 있습니다.

햇살이 좀 퍼지기 시작하면 오늘의 주인공 아주머니들이 슬슬 나타납니다. 장롱 속에 감춰뒀던 손가방을 꼭 하나씩 손에다 쥐고 오랜만에 화장도 하시고 버스에 오르십니다.

“기사양반 오늘 좋은 데 가나?” “아이고 계단이 와 이리 높아!” “에이 이 몸뚱이 해가 지고 집에나 있을걸”

네 굽으로 버스를 오르시고 아주머니들은 푸념으로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도 버스 앞쪽부터 자리를 채워 앉으시니 “배추는 밭에 있는데 이렇게 가도 되느냐” “춥기 전에 김장을 해야하는데” “이 나이 먹고 젊은 틈에 괜히 가는 거 아녀?”

아주머니들이 다 타고 이장이 몇 번을 재촉하고서야 아저씨들이 슬슬 버스에 올라 뒷자리를 마저 채우면 버스가 출발을 합니다.

이장이 인사를 하고 떡을 돌리고 술을 돌리고 억지로 노래도 시키고.... 그러나 별 흥이 나지 않습니다.

아주머니들은 옆 사람과 조용조용 이야기나 하고, 아저씨들은 소주잔을 돌리다가 이내 담배를 물고 창문을 열면 아주머니들이 구박을 하고 그러다 보면 버스는 벌써 바닷가 식당 앞에 섭니다.

점심을 먹고 시장을 보고 다시 버스에 올라 어느새 집으로 돌리는 순간 아주머니들이 살아납니다. 정말 놀라운 광경이 벌어집니다.

‘ㄱ’자로 허리가 꺾여 땅을 물고 다닌다던 작은 어머니가 허리를 펴고, 주여!! 겨우내 침을 맞으러 다녀야 한다던 재덕 엄마가 뛰기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아, 얌전하기로 소문난 정희 엄마가 도망가는 영감님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아부지!! 이렇게 시작된 기적은 무려 다섯시간을 자리에 앉을 줄을 모릅니다.

처음 관광버스를 탔을 때는 그저 놀랍기만 했더랬습니다. 1년여 밭고랑에 묻었던 한숨의 날들을 오늘 하루 저렇게 풀어버리는구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이던가요.
여의도에 그 아주머니들과 그 관광버스들이 미어 터지던 날 이마에 맨건지 머리를 묶은 건지 머리띠를 뒤집어 맨 분도 계시고 새벽밥 먹고 바다 갈 때 들던 그 손가방을 들고 꾸역꾸역 한강 둔치로 모여드는 아주머니들의 웅성거림을 보면서 아, 저것이구나!

이랑과 고랑도 없이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고 허리를 펴는 것 보다 숙이고 있는 시간이 더 길던 우리의 어머니들이 허리를 펴고 나서는 날도 원래 저렇게 힘들이 나시는구나.

다시 가을이 저물고 있습니다. 추수를 끝낸 빈 논 위에 하얀 서리가 내린 관광버스가 또 아주머니들을 실으러 올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꼭 그날의 관광버스에서 뿐만 아니라 씨앗 뿌리로 봄 들판에서도 녹아 내리고 팔월의 밭고랑에서도 즐거이 허리 펴는 아주머니들의 날이 어서 오기를 빌어보는 아침입니다.

〈경기도 여주시 전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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