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라면 - ③] 중정(中情)이 조달해준 라면 기계 값 6만 달러

  • 입력 2017.07.21 14:59
  • 수정 2017.07.21 15:49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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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전중윤이 동경의 호텔에서 처음 맛본 것이 「묘조(明星)라면」이었는데 그 때에도 물론 봉지 안에 스프가 따로 들어 있었다. 그러나 초기 개발 단계에서는, 라면을 튀기기 전에 면발을 양념국물에 담갔다 빼는 방식으로 제조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 보니 양념이 잘 배어들지 않았으므로, 나중에 별도의 포장을 해서 봉지 속에 끼워 넣었던 것이다.

전중윤이 판단하기에 라면의 매력은, 단순히 수제비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국수를 동물성 기름에 튀김으로써 모자란 지방분을 함께 섭취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강점이었다. 전중윤은 뜻한 바 있어 그 일본 라면을 여행 가방이 불룩하도록 넉넉하게 사가지고 귀국 행 비행기에 올랐다. 잘만 하면 미국의 원조 소맥분(밀가루)으로 한국에서도 라면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겠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 시기는 바야흐로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인들의 세상이었다. 따라서 무슨 사업이든 시도해보려면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이 쿠데타의 명분으로 내건 이른바 <혁명공약>의 제4항은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로 시작 되었다. 따라서 서민의 배고픔을 덜어줄 새로운 먹을거리의 개발은 그들의 관심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전중윤은 이리저리 연통을 넣어서 그들 몇과 ‘라멘’ 시식 자리를 함께 할 기회를 가졌다.

“맛은 뭐 괜찮네. 이 꼬불꼬불한 튀김국수를 생산해서 공급하면 식량난을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라 그 얘긴데….”

“지금 <유솜(USOM)>에서 우리나라에 오는 원조 밀가루는 많지만, 그걸 가지고 단순히 밀개떡 쪄먹고 수제비나 해먹는 방식으로는 국민영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라면을 만들어서 공급하면 식량난을 크게 덜 수가 있습니다. 제가 보험회사 정리하고 그 일을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좋은 얘긴데, 일본에서 라면 만드는 기계를 사오려면 달러를 갖고 가야 할 것 아니오?”

“예. 기술료는 제외하고라도 우선 기계 값 6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뭐요? 6만 달러!”

모두가 펄쩍 뛰었다. 상공부든 어디든 탈탈 털어봐야 달러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전 사장, 라면인지 튀김국순지 그거 한 그릇 자알 얻어 먹었수다.”

모두가 손을 털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나가면서 전중윤의 귀에 대고 넌지시 말했다. 남산에 가서 도움을 청해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남산’이란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직속으로 발족한 중앙정보부를 지칭한다.

과연 ‘중정’은 무소불위였다. 당시 정부 부처 중 농림부에 미국에서 들여온 달러 10만 불이 있었는데, 중정에서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위세’를 행사하여 그 중 6만 불을 전중윤에게 할당받게 해준 것이다. 당시 중정부장은 김종필이었다.

비록 당시 한국과 일본 간에는 아직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손에 달러를 쥐었으니 라면 기계를 사오는 데에는 어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라면제조에 필요한 기술을 함께 가져오지 못 하면 그 기계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전중윤이 기계를 구입하고 최소한의 기술을 현장에 가서 익힐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은 김평진이라는 제주도 출신의 재일 실업인이었다. 김평진은 그를 묘조라면의 고쿠이 사장에게 소개했다. 신용장(L/C)을 확인한 고쿠이가 말했다.

“좋습니다. 이 돈 가지면 라면 제조기계 2개 라인은 구입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기계 일체를 구입해서 한국으로 가져다 설치해 줄 수는 있으나…라면 제조 기술의 전수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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