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나, 여성농민이야!
[여성농민으로 산다는 건] 나, 여성농민이야!
  • 구점숙(경남 남해)
  • 승인 2017.07.2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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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점숙(경남 남해)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말처럼 자만심 가득한 자랑꺼리가 나에게도 있었으니, 1977년도 시골에서 초등학교 입학을 하자마자 반장이 된 것입니다. 요즘이야 학급반장 선출에 남녀가 따로 구별이 없지만 1977년도만 해도 응당 남학생들이 반장을 하고 여학생들은 부반장을 하던 시설이라 제법 파격인 셈이었지요.

물론 지금처럼 선출이 아니었고 담임선생님께서 지명을 하는지라 입학하자마자 어떻게 선생님의 눈에 들었는지는 지금도 궁금합니다. 다만 굳이 유추해볼 량이면 숫자쓰기 신공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입학한 지 며칠 안 된 어느 날, 선생님께서 종이에 1부터 10까지 써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말귀를 잘 못 알아들은 탓에 남들이 10까지 쓸 때 나는 100까지 쓴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질은 꽤나 급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곧장 반장으로 지목됐던 것입니다.

그러고서 반장역할을 잘 했냐면 뭐 별로였습니다. 종례시간 전 숙제검사시간에 선생님 앞에서 오줌을 싼 기억도 여러 번 있거니와, 밥 먹는 것이나 잠자는 등 매일 하는 일은 제외하고서 일기를 써라 했건만 노란 알루미늄 두레밥상에 둘러 앉아 식구들끼리 밥을 먹는 그림일기를 부지기수로 그렸었습니다.

교육청에 제출할 것이라고 잘하라는 격려는 아랑곳없이 한 방에서 온 식구들이 이불을 덮고 잠자는 모습도 제법 그렸었지요. 그러니 그 초등학교 1학년 여자반장의 명예는 오간데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숫자쓰기 신공도 나름의 실력이라 생각하고 마흔이 다 되도록 이화여자대학교를 나온듯한 자부심을 마음속에 묻어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고도 남는 의문 한 가지는 숫자쓰기가 뭐라고 선생님께서 나를 반장으로 지목하셨을까? 라는 것입니다. 묻고 묻던 끝에 새로운 깨달음을 한 가지 얻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달걀 같은 얼굴모양에 숱이 많은 긴 생머리를 단아하게 묶은 처녀선생님이셨습니다. 동네 언니들처럼 촌스럽지도 않고 일만 시키는 어른들과 달리 교양 있고 따뜻하고 고운 분이셨습니다.

그런 선생님께서 갓 교직생활을 시작한 그 시절에도 성차별을 느끼셨나 봅니다. 다른 어떤 직업장면보다 교사들이 느끼는 남녀차별이 덜 한데도 선생님께서는 분명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부딪히는 것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러고서는 그 당시 시골학교에서는 전례가 없던 여자반장을 세운 것입니다.

만약 그 어린 시절에 철이 들었더라면 선생님의 높은 뜻을 살려 쉬는 시간에 놀지 않고 화장실 다녀와서 반장다운 면모를 보였을 것을, 길가다가 관찰한 물봉선화한테 반한 이야기며 개울에서 송사리를 잡다가 놓친 안타까움도 일기로 써 볼 것을 말입니다.

지금 나에게 선생님처럼 스스로의 정체성에 부딪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연지사 여성농민문제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농사일과 가사일과 지역 일을 하며 사회에 기여하는 데도 여성농민의 지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 그런데도 늘 당연히 알아서 잘 해줄 것을 바라는 세상의 눈높이에 대해서 파격을 던지고 싶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작은 교실에서 절대자의 힘으로 지명을 행사할 수 있지만 여성농민은 그럴 수 없기에 힘을 모아야 된다고, 서로의 처지를 공감하고 연대하며 세상에 제 목소리를 내는 것만이 스스로 파격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고 싶어요. 때로는 제도와의 싸움이기도 하고 통념과의 싸움이기도 하고 가족과의 갈등이기도 하고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해서 범주도 다양하고 대상도 여럿이라 복잡하지만 출발은 스스로라는 것입니다.

이를 페미니즘 또는 여성주의라 한다지요? 여성농민과 페미니즘, 멀고도 멀지만 세상은 점점 기울기가 회복될 테니까요. 그러면 이대 나온 여자라는 말보다 ‘나, 여성농민이야’ 하는 말이 훨씬 멋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당연히 그렇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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