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라면 - ② 꿀꿀이죽과 수제비를 극복하라
[그 시절 우리는] 라면 - ② 꿀꿀이죽과 수제비를 극복하라
  • 이상락 소설가
  • 승인 2017.07.14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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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내가 서울특별시 하월곡동의 <삼양식품> 본사를 찾아 전중윤 회장을 만난 때는, 그가 작고하기 12년 전인 2002년 5월이었다. 그때 이미 그는 여든네 살의 고령이었음에도 자리에 마주앉자마자 세계 각국의 라면 소비현황을 줄줄이 꿰었다.

“전 세계 40여 개 나라에서 1년에 소비되는 라면이 463억 식입니다. 그 중에서 제일 많이 소비하는 나라는 중국의 159억 식이고 인도네시아가 92억, 일본이 세 번째로 52억, 한국이 37억으로 4위예요. 미국이 28억, 태국이 15억, 러시아가 5억….”

우리나라가 세계 4위의 라면 소비국으로서 연간 37억 식(食), 즉 37억 봉지를 소비한다는 얘긴데, 2002년 당시 남한 인구가 4천만으로 집계되고 있었으니 한 사람이 1년에 90 봉지가 넘는 라면을 먹는다는 계산이다. 전중윤 회장은 1963년에 <삼양식품>에서 최초로 라면을 생산한 이래 그 동안 약 180억 봉지의 라면을 만들어 팔았다는데, 그 면발을 모두 한 줄로 이으면 지구와 달 사이를 5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자랑했다. 이제 그의 증언을 더듬어, 그 길고도 구불구불했던 우리나라 라면의 역사를 함께 탐색해 보기로 하자.

1950년대 말, 서울 남대문 시장.

당시 전중윤은 해방 전에 체신부의 보험관련 부서에 근무하다가 해방 후 공직을 그만두고 조그만 보험회사를 차려 꾸려가던 중이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직원과 함께 남대문 시장 들머리를 지나다가, 시장 통에서 새어나오는 구수한 냄새에 이끌려 아예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기왕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터에 그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어보자는 계산이었다.

시장 한복판 공터에서는 드럼통을 화덕 위에 올려놓고 무엇인가를 끓이고 있었고, 한 사내가 막대기로 드럼통을 두드리며 “자, 자, 새치기 하지 말고 한 줄로 서요! 음식 받은 사람들은 5원씩 내고 저 쪽 공터로 가서 먹으세요! 복잡하니까 다 먹은 사람들은 좀 비켜주세요!” 따위의 말을 외치면서 몰려든 사람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시장 노무자들이 5원씩을 주고 양철냄비에 받아먹고 있는 그 음식이 바로, 나이든 사람들이 당시의 피폐한 경제사정 때문에 고생했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상징적으로 잘 들먹이는 일명 ‘꿀꿀이죽’이었다. 미군들이 먹고 버린 음식찌꺼기를 미8군에서 가져다가, 그 중에서 먹다 남은 고기 뼈다귀 따위를 골라 배추 시래기와 함께 드럼통에 넣고 끓인, 그야말로 ‘꿀꿀이’에게나 먹여야 마땅한 음식이었다.

“그 장면을 보고서 내가 왜 꿀꿀이죽과 수제비를 떠올렸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미국에서 밀가루는 무진장 원조를 해주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삼시 세 끼 밀가루만 먹고 살 수 있나요?”

그 때 미국의 대외 경제원조 기관이었던 <유솜(USOM)>에서 밀가루 원조는 비교적 풍족하게 해줬으나, 그렇다고 날마다 수제비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도시 빈민들에게 그 꿀꿀이죽은 그나마 기름기를 섭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은 60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1960년대 초 일본 도쿄의 한 호텔.

당시 전중윤은 보험회사 사장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들렀다는데, 도착하던 날 모두가 숙소에 들었을 때 전중윤이 가방에서 무슨 과자봉지 같은 것들을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일행은 다 큰 어른이 체신 머리 없이 무슨 과자냐고 의아해 했다. 봉지를 뜯고 보니 무슨 튀김국수 같은 것이 나왔다.

“이것이 일본 사람들이 즐겨 먹는 ‘라멘’이라는 신발명품 음식이래요. 이걸 꺼내 그릇에 담고 끓인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다니까요.”

“아무 양념도 안 하고 무슨 맛으로 멀건 국수를 먹어요?”

“걱정 말아요. 여기 스프라는 포장양념이 별도로 있으니까.”

전중윤이 호텔 측에 부탁하여 조리를 해보니 기름방울이 둥둥 떠올랐다. 그는 속으로 그 라멘이, 꿀꿀이죽의 기름기와 수제비를 결합한 먹을거리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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