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사는 검은 소 이야기

  • 입력 2017.07.14 10:48
  • 수정 2017.07.14 10:51
  • 기자명 배정은 기자·사진 한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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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호 기자

[한국농정신문 배정은 기자]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한우는 곧 황소다. “밥 먹고 누우면 소 된다”던 엄마의 잔소리 속 소도 누랬다.

1910년 발간된 문헌 조선지산우(朝鮮之産牛)에는 ‘한우의 모색은 주로 적색이지만 적갈색도 있고 흑백무늬도 있다’고 명시돼 있다. 1930년대까지 발간된 농축산 관련 문헌은 다양한 색상의 소가 우리 땅에 살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서도 한우를 황우, 흑우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여러 문헌을 바탕으로 기원전 18년 경부터 제사용, 농경용, 식용, 약용 등으로 소 등의 가축을 길렀을 것으로 추측했다. 2002년에는 제주 애월읍 곽지유적지에서 약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소뼈가 발굴됐다. 학자들은 현존하는 제주 흑우와 유사한 것으로 입증하면서 기원전부터 흑우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했다.

역사 속 흑우는 다사다난했다. 조선시대의 문헌에는 특히 흑우가 자주 등장한다. 세종실록에는 ‘제주 흑우는 고기맛이 우수하여 고려시대 이후 임금님 진상품으로 공출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숙종 28년(1702년)에 이형상 제주목사가 만든 탐라순력도에는 흑우 사육기록도 남아있다. 제주의 토종 재래가축이었음을 확신케 하는 대목이다. 수랏상과 제사상 뿐만 아니라 외교에 있어 화친을 위한 용도로도 흑우는 기꺼이 자신을 내놓았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흑우는 수탈된다. 쌀과 콩 다음으로 중요한 수탈 대상이 된 소, 그 중 제주 흑우는 1924년 암소 125마리, 수소 50마리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듬해에는 암소 25마리와 수소 1마리까지, 일본인들은 201마리의 제주 흑우를 훔쳐갔다. 그리고 일본은 4년 뒤인 1928년, 일본 흑우 ‘와규’의 원조인 미시마소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명확한 근거는 없으나 미시마소 개량에 제주 흑우가 이용됐을 것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증언이다.

문성호 제주농업마이스터대학 교수는 “한라산과 야우리(시내)에서 포획한 뒤 체형이 우수한 소만 가지고 갔다. 일본이 미시마소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후 제주 흑우는 한우 모색표준지침에 따라 쇠퇴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1750년 경부터 무인도였던 가파도에 ‘별둔장(別屯場)’이라는 국영 목장을 두고 흑우를 방목해 키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1840년 12월, 중국과 아편전쟁이 한창이었던 영국 군함 2척이 가파도에 나타나 포를 쏘고 사육중이던 흑우를 약탈해간다. 흑우 수탈이 외세에 의해서만 이뤄졌던 건 아니었다. 조선시대 제주 관리들이 중앙관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비리’의 용도로 쓰였던 것. 잘 키워놓으면 관리들이 빼앗아가기 일쑤니 흑우가 태어나면 몰래 도살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었지만,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던 흑우는 1994년 문성호 교수에 의해 가까스로 복원됐다. 2013년 7월 22일에는 국가지정문화재 천연기념물 제 546호로 지정되며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흑우의 뿔에서 가운데 하얀 줄무늬는 주인에게 해를 가하지 않고 재물복을 안겨준다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 이제는 수탈의 대상에서 벗어나 농민들에게 자랑스럽고 든든한 한우로 거듭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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