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신임 이장의 고민

  • 입력 2017.07.02 11:29
  • 수정 2017.07.02 11:32
  • 기자명 이영수(경북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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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경북 영천)]

이영수(경북 영천)

올해로 귀농 10년차다. 10년 만에 마을 이장이 됐다. 우리 마을은 5개의 자연부락이 있고 120여 가구가 거주해 면에서도 꽤 큰 마을에 속한다. 귀농을 하면서 다른 건 몰라도 태어난 고향 마을에 이장은 한 번 해야지 마음먹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현실이 되었다. 아무튼 성공한 이장이 되리라 마음먹고 있다.

막상 이장이 되니 생각보다 일이 많다.

마을숙원사업 해결은 물론 마을주민들의 고충상담에서부터 주민등록 일제조사, 농업경영체 등록, 직불제 신청, 지방세 납부 홍보, 민방위 훈련 고지서 전달, 각종 정책사업 안내, 행사 조직화 및 교육홍보 등 다양하다. 그래서 이장은 정치력도 있어야 하고 상담사 역할도 해야 하고 민원계장, 산업계장, 총무계장, 민방위대장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한다. 또 대부분의 이장들은 영농회장을 겸직하고 있어 수천만원의 월급을 받는 농협직원들 대신 과일상자, 비료, 농자재, 볍씨, 콩 등을 마을사람들에게 신청 받고 때로는 배송까지도 해야 한다.

그런데 신임이장이라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해서 그런지 때로는 납득이 안 가는 일들이 종종 있다.

올해 초 이장회의를 하면서 장기 내 기생충 퇴치사업을 위해 마을별로 10여 명씩 대변을 채취해 오라는 협조요청이 있었다. 1인당 밤알 1개 크기로 담아 와야 한다고 했다. 마을에 돌아와서 어르신 몇 분에게 여쭈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이장이 알아서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마을총무와 친한 형님 동생들에게 부탁했음에도 4개만 수거돼 면사무소에 갔다. 할당량을 다 채우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마침 담당자가 없어 다른 직원에게 부탁하고 얼른 돌아왔다. 그날 오후 연세 드신 다른 동네 이장님이 밭으로 찾아왔다. 대변통 수거 문제로 담당공무원과 한 판 하고는 분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요지는 힘들게 주민들에게 사정사정해 대변통을 5개 들고 갔는데 담당자가 대뜸 “이래 가지고 동네에 사업이라도 하나 받겠능교?”라고 했다는 것이다. 순간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지 못 한 미안한 마음은 사라지고 이장을 호구로 아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담당자가 독촉전화가 왔기에 기생충 퇴치사업이 그렇게 좋은 사업이면 면사무소든 보건소든 담당 공무원이 마을총회나 경로당에 직접 와서 홍보라도 한 번 하는 게 순리지, 이장한테만 덜렁 맡기고 담당자는 대변통 수만 세고, 영천시는 실적이나 챙기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져 물었다.

또 지난 이장회의에서는 멧돼지가 복숭아나무에 올라타 가지를 찢고 뿌리를 파헤치는 일이 빈번해 이장들이 대책을 세워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면장님이 “이장님들이 밤에 자기 마을에 보초라도 좀 서시소” 한마디 했고, 그 소리를 들은 이장들은 수천만원 월급 받는 면장과 면직원이 서야지 왜 이장이 서냐고 시끌벅적했다. 평소 인품 좋기로 소문난 면장님의 우스갯소리에 이장들이 언성을 높이자 면장님이 당황해 했다.

하지만 이장들이 언성을 높인 이유는 세우라는 멧돼지 피해대책은 몇 년째 지지부진하면서 행정적 대책도 없고 책임지는 공무원 한 명 없는데 이 또한 우스갯소리로 이장들한테 떠 넘기냐는 불만이었으리라.

이장은 마을의 대표로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는 주체이며 행정과 주민 간의 가교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주민 자치력을 높이는 문제와 공무원의 역할 축소는 상관관계가 없다.

요새 귀농귀촌 바람과 함께 주민자치 활동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이장들이 자주 소개된다. 한편으로는 주민자치력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공무원의 역할을 스스로 축소하고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과 책임까지도 슬그머니 이장들에게 떠넘기는 건 아닌지 고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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