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이겨낸 억척스런 농사꾼

이 사람 ㅣ 시련 앞에 꿋꿋하게 살아온 춘천 농민 임문혁씨

  • 입력 2017.06.25 06:41
  • 수정 2017.06.25 06:45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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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불의의 사고로 한 팔을 잃고도 아내와 함께 5남매를 키우며 농민들의 권익을 지키는 운동과 동시에 농사에 매진해온 임문혁씨가 옥수수밭에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고 있다.

동네 어귀에서 골짜기로 가는 길가 단동하우스에서는 단호박이 열매를 맺고 있다. 강원도인지라 밭에 지어진 하우스는 크지 않았다. 중턱에는 두세 마지기 남짓 돼 보이는 논에 제법 포기가 벌어진 벼가 크고 있다. 가뭄이라지만 물고에서 졸졸졸 물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외딴집을 지나 하우스 너머 대추나무 밭에서 농민이 기자를 반긴다. 오늘 만나기로 한 농민 임문혁씨다.

사고로 오른팔을 잃은 그는, 길가로 나오자 왼손에 낀 장갑을 오른발로 밟아 벗어 던지고 기자를 한 집으로 안내한다. 이곳은 오랜 친구집이다. 골짜기 외딴 집에는 노인 내외분만 살고 있다. 텃밭에는 참깨와 옥수수가 알뜰하게 심어져 있다. 가뭄에 제대로 크지 않은 옥수수는 벌써 개꼬리를 내밀고 있어서 먹을 수나 있는지 알 수 없다. 긴 가뭄에 무엇보다도 밭농사 피해가 눈에 띈다.

춘천시의 초입이고 남쪽으로는 홍천군과 맞닿은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광판리에서 뜨겁게 한평생 살아온 올해 84세 임씨는 오른팔이 없다.

이 분의 불편한 신체를 소개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우리 사회는 남과 다른 것에 대한 일종의 거부감(?)이 있다. 차별의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 팔이 없는 것을 먼저 소개하는 것은 비록 몸이 성치 않아도 움츠러들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리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나온 인생에 어떤 굴곡에서도 꼿꼿한 여든 농민의 삶이 경외스럽다.

군사독재정권의 광폭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농민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앞장서 싸워 왔다. 지금도 그는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최초로 쌀 생산비 조사를 실사한 것에 가슴 가득 자부심을 갖고 있다.

“1975년도에 가톨릭농민회 교육을 받고 3년 동안 쌀 생산비 조사를 했어. 그때 교수들 박사들이 교육을 하고 영농일지를 만들어 줘서 매일같이 한 일을 적고, 들어간 비용을 1년간 적어서 쌀 생산비를 조사했지. 그전에는 신경도 안 쓰고 잘 몰랐는데 직접 조사를 해보니까 농민들이 너무 억울한 거라. 추곡수매가가 생산비에 절반 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지. 그러니 데모를 안 할 수가 없었어.”

가톨릭농민회에서는 1977년 8개도 146농가의 생산비를 조사해 발표했다. 이중 80%농가 생산비를 발표했는데 일반벼 4만1.600원 통일벼 3만9,840원이었다. 당시 수매가는 2만6,000원에 불과했다.

“그때는 추곡 수매가 문제 뿐 아니라 전국 어디에든 농민들이 싸우는 곳이 있으면 쫓아가서 같이 싸웠어. 함평 고구마 싸움에도 같이 했고, 오원춘 사건이 났을 때 안동에 싸우러 갔어.”

농민운동의 초창기 시절 농민투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국이었다. 경찰 뿐 아니라 군청 공무원 심지어 농협 직원까지 나와서 농민들을 감시하고 농민 투쟁을 탄압하던 시기였다. 그에 비해 싸우는 농민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농민운동가들은 지역의 투쟁이 일어나면 내 일처럼 함께 해왔다. 그 투쟁의 현장에 임씨도 빠짐없이 힘을 보탰다. 농민운동사의 역사적 현장을 함께 일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쪽 팔이 없는 불편한 몸에 위축된다거나 ‘적당히’ 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삶을 지켜온 그의 미소가 선하다.

“춘천교구 유병권 회장이 갑자기 구속 된 거야. 그래서 내가 회장 대행을 하다가 자연스레 회장을 하게 됐어. 유병권 회장이 재판을 받는 날, 춘천경찰서장한테 재판을 방청하게 방청권 200장을 준비해 놓으라고 했어. 서장이 그러마! 하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재판정에 가니까 100명 밖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나서 경찰서장 멱살을 잡고 혼을 내줬어.”

젊은 시절 무용담을 꺼내며 임씨는 상념에 눈빛이 깊어졌다.

30대 초반, 방앗간 일을 하다 큰 사고 당해

“원래 고향은 여기가 아니고 홍천 북방면이야. 군대 통신병으로 제대를 했는데, 아는 분이 공고 나와서 앰프공사(라디오 스피커 선을 집집에 연결하는 공사)일을 하는데 잘 모르니까 나보고 도와달라고 해서 28살에 여기에 오게 됐어. 처음에는 농사를 지은 게 아니라 유선방송 일을 했지. 그때는 아주 인기가 좋았어. 동네에 결혼 앞둔 처자들도 많아서, 딸 가진 어른들이 서로 딸 주겠다고 할 정도였어. 아내는 나보다 12살이 어려. 그러니까 그 때 16살이었지. 장모님이 데리고 가라고 하셔서, 너무 어려 밥도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전부 가르쳐서 보내라고 했어.”

12살이나 어린 신부를 맞아 임씨는 결혼을 했고, 1년 후 아이도 태어났다. 앰프공사도 하고 삶을 꾸려가던 그는 리동 농협이 생기고 거기서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일을 하게 됐다. 큰 사고는 그 때 일어났다.

“33살 때야. 정미소에서 품을 팔다가 피대에 팔이 감겨 들어갔어. 그게 스물일곱 바퀴나 돌고 팔이 끊어져 나가면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 그때는 차도 없어서 리어카에 싣고 20리 거리를 동네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해서 겨우 모래재까지 갔어. 거기서 우연히 경찰차를 만나서 그거 타고 병원에 갔어. 다행히 수술이 잘돼서 고생은 많이 하지 않았지. 그때는 뭐 보험이 있나, 법이 있나, 겨울 나라고 쌀 세가마니 주더라고. 그게 보상금의 전부였어.”

33세의 젊은 청년 임문혁은 그날 오른팔을 잃었다. 병원에서는 어깨까지 절단 하자는 것을 나중에 의수라도 달겠다고 조금 남겨놔 달라고 했고, 지금까지 억척스런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낙담이야 많이 했지. 죽고 싶기도 하고, 왼손으로 밥을 먹는데 젓가락질이 잘 안 되는 거야. 화가 나서 젓가락을 내팽개치다 시피하고 이제 밥 안 먹는다고 강짜도 부렸어. 이때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양봉도 했어. 양봉하던 첫해는 잘 되서 벌통 열 개에서 꿀 일곱 말을 떴어. 그 당시 친척 중에 조폐공사에 다시던 사람이 있었어. 꿀을 대전으로 가지고 오라고 해서 가지고 갔더니 그 자리에서 차에 전부 싣고 돈을 주더라고. 농사도 잘되고 파는 것도 쉽게 잘 팔았지. 참 열심히 살았어. 나도 그렇고 집사람도 그렇고 부녀회장도 하고.”

불편한 몸에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주위에서 도움도 많이 줬다고 한다.

“시에서 여기 강변에 논을 3만평을 만들었어. 그때는 손으로 모를 내던 시절이잖아. 나한테 못자리를 해달라고 하더라고. 매일같이 모를 심을 수 있게 준비를 하라는 거야. 그래서 못자리를 6개로 나눠서 준비했지. 그리고 우리 집사람한테는 모내는 사람들 밥을 준비해달라는 거야. 한 달 동안 나는 모를 대주고 우리 집사람은 밥을 해 댔어. 모도 밥도 어마어마했는데, 그 때 그걸 어떻게 했는지 몰라.”

불편한 몸에 가진 것 없이 어려운 살림을 알뜰살뜰 함께 꾸려온 부인은 3년 전 암으로 세상과 이별을 했다.

“인제에서 양봉을 할 때 슬레이트가 부러지면서 다리를 다쳤는데 벌통을 들고 가다가 넘어져서 다리뼈가 부러졌어. 인제성당에 외국인 신부님한테 부탁했더니 다음날 3군단 병원으로 데려가서 고쳐주더라고. 그리고 여기 광판리에 와서 7년 만에 다리뼈가 재발을 한거야. 팔 하나 없는 가난뱅이가 뭘 어찌해야 하나 걱정만 늘어 가는데, 군종 신부님이 도와주셔서 2군단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해줬어. 7년 후에 또 재발 하더라고. 이번엔 소를 팔아 고쳤는데 20년 만에 또 아프다고 해서, 서울 병원에서 치료 하고 수술하고 퇴원하려는데 뼈암이라는 거야. 거의 손도 쓰지 못하고 죽었어. 속상하지.”

16세의 어린 나이에 임씨에게 시집와서 5년 만에 한쪽 팔을 잃어 좌절하는 남편을 보듬으며 5남매를 함께 키워온 부인을 그렇게 떠나보냈다. 부인의 이야기를 하는 임씨는 병원에서 뭐 잘못한 거 아니냐며, 본인이 다쳤을 당시를 더듬을 때 보다 더 깊은 한숨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송아지 키워 5,000평 땅 주인이 되다

분위기도 바꿔볼 겸 가장 좋은 시절이 어느 때냐고 물었다.

“내가 교육 받는 거 참 잘 따라 다녔어. 정부 교육 같은 거. 그런데 한번 가니까 돼지를 키우라는 거야. 사료 처음 나올 때야. 젖 떨어진 새끼돼지 사료 먹이면 살이 잘 찐다고. 그래서 홍천장에 갔더니 소 값이 떨어져 송아지 한마리가 1만6,000원에서 좋은 거는 2만4,000원인거야. 평균 2만원 꼴로 해서 7마리를 샀지. 그리고 3개월을 길러서 한 마리에 23만원씩 받고 팔았어. 또 했으면 금방 부자 되는데 사료 값이 40%나 올라서 그만두고 그 돈으로 땅을 샀어. 140평 모자라는 3,000평을 샀어. 송아지 키워 석 달 만에 땅 3,000평을 샀으니 벼락부자가 된 거지. 그리고 남에게 준 소가 2마리 있었는데 그거 팔아서 1,000평 더 사고, 농사지은 쌀 7가마로 1,000평 더 사서 5,000평이 된 거야. 금방 부자가 됐지, 그런데 쉽게 얻은 재산은 쉽게 없어지더라고. 친환경 농사할 때 딸이 차로 배달을 했는데, 차타고 옥수수 밭에 가다가 사고를 내서 보상금 해주고, 큰 딸 식당 한다고 해서 돈을 얻어줬는데 IMF가 와서 장사가 안 되니까 빚을 못 갚더라고. 연체이자가 좀 비싸? 4,000만원 빌린 게 나중에는 1억을 넘게 갚았어. 결국 땅을 다 팔았지. 지금은 내 땅이 거의 없어. 작년에 2,500평 사고. 결국 큰 딸은 사업 정리하고 여기 내려와서 살아. 엄마가 없는 집에 딸이 들어와서 같이 살고 있어. 그래서 생활하는 데 불편 없이 지내.”

꽃 농사 짓는 막내아들, 뒷일 돕는 아버지

임씨는 딸 둘, 아들 셋 5남매를 두었다. 그 중 막내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를 이어서 농사를 짓고 있다.

“그 애가 원예과를 나왔어. 며느리도 원예과 나오고. 학교 졸업하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하우스에서 꽃 농사를 크게 하지. 작년에 튤립 구근을 1억1,000만원어치 구입했다는데, 큰 차로 세 대가 오더라고. 그거 심어서 다 소비시켰어. 김영란법 아니면 훨씬 나을 텐데 아무래도 타격이 있어. 그 전에 일본에 수출할 때는 포장만 해 두면 다 싣고 가 참 편했는데. 지금은 엔화가 안 맞아서 수출 못해.”

아들은 고향에서 아버지와 다르게 사업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아들은 꽃 농사에 전념하느라 다른 농사는 거의 신경을 못 써. 3년 전에 대추 묘목을 500주 심었는데. 나한테 교육가라고 하고, 관리하라고 해서 내가 키우고 있어. 올해부터는 조금씩 딸 수 있을 거야. 말리는 대추가 아니라 생과로 먹는 큰 대추야. 그리고 감자, 콩, 옥수수, 참깨, 들깨, 무, 배추 집에서 먹는 거는 모두 내가 농사지어서 나눠줘. 오늘도 대추나무 손질했네. 이제 집에 가서 점심 먹고 쉬다가 저녁에나 나와야지. 가물어서 큰일이야. 대통령이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

한 시절을 뜨겁게 살아온 농민은 지난 오십년을 그랬듯 여전히 한 손으로 자식들을 챙기며 농사를 짓고 있다. 이제 자식들은 모두 자리를 잡아 살아가고 있으나 임씨에게 못내 아쉬운 것은 오늘의 평안함을 함께 할 아내의 부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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