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일이 어려운 것은 벌레와 균뿐만이 아니다. 고라니와 멧돼지도 있다. 강원도가 대부분 그렇지만 산이 가까이 있는 이곳 양양 강선리에는 고라니와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농민들은 고라니 망을 치거나 철망을 쳐서 이들로부터 작물을 보호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 고라니와 멧돼지가 좋아하는 채소나 고구마 등은 아예 심을 생각을 말아야 할 정도이다. 그물망을 치기도 하지만 매년 수선해야 되고 신경을 많이 쓰는 작업이다.
나도 금년 봄 농장의 200여 미터 둘레에 철망을 쳤다. 고라니뿐만 아니라 멧돼지 피해도 막으려는 심산이었다. 지난해 그물로 된 고라니망을 쳤으나 겨울을 지나면서 멧돼지들이 온통 망가뜨려 놓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물망 대신 철망을 쳤으니 매년 고생하지 않아도 되겠거니 안심이 됐다.
그런데 서울에 일이 있어 농장을 며칠 비웠다가 내려와 농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고라니 똥이 여기 저기 장난이 아니었다. 아뿔싸 이놈들이 들어왔음이 분명했다. 눈이 동그래져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더니 토종고추, 토종땅콩, 미니사과, 체리 등의 보드라운 싹을 싹둑 싹둑 잘라 먹은 것이 아닌가. 특히 토종고추는 세력이 약해 이제 겨우 살려 놓았는데 나쁜 놈들이 요렇게 망가뜨려 놓다니 괘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토종 토마토, 가지 등은 건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미니사과 밭을 돌아보다가 고라니 두 마리가 아직도 농장 안에 있는 것을 목격했다. 들어는 왔으나 나가지 못하고 며칠을 농장 안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철망을 다 쳤으나 대문을 아직 달지 않아 조금 엉성한 그리로 들어온 것 같은데 이놈들이 그 입구를 못 찾고서는 며칠을 못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즉각 나갈 곳을 열어 놓고 몰았으나 엉뚱하게도 철망 있는 쪽으로만 나가려고 점프를 하고 난리 법석을 떨더니 한참 이리저리 숨바꼭질을 하다가 겨우 문을 찾아 농장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한참 후 윗골 농민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시다가 나를 보고는 고라니 얘기를 하신다. “아 그 고라니 새끼가 부모 고라니가 없는 사이 자기네 밭으로 내려 왔는데, 지금 우리 밭에서 나간 부모 고라니가 새끼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달려와 새끼를 데리고 산으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농민 말씀은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무서워하지도 않고 전혀 개의치 않더라는 것이다. 하긴 며칠만의 이들 고라니 가족의 상봉이었으니 인간 따위의 적은 무서울 리가 없었겠지만.
그러고 보면 대자연의 일부인 고라니도 당연히 자연과 더불어 먹고 살아야 하고 동시에 인간과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일진대 너무 미워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라니 입장에서는 좋아 하는 먹거리가 거기 있으니 들어가 좀 먹은 것뿐인데 뭘 그리 난리를 치느냐고 못마땅해 할 것 같다. ‘우리가 먹는 것이 그렇게 싫으면 밭에 못 들어가도록 잘 막아 놓으면 될 걸 가지고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