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할래? 일 할래?

  • 입력 2017.06.11 22:28
  • 수정 2017.06.15 16:26
  • 기자명 김정열(경북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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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김정열(경북 상주)]

해가 길어지니 곡식을 가꾸는 손길이 점점 바빠집니다. 자연스레 농민들의 일하는 시간도 길어집니다. 이른바 농번기입니다.

농민에게 농번기라 함은… 해야 할 모든 농사일이 한꺼번에 몰아친다는 것입니다. 모심기도 해야 하고, 과수원의 나무들은 달린 열매가 너무 버겁다고 아우성이고… 심고 가꾸고 해야 하는 모든 농사일이 해일이 덮치듯 한꺼번에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뚜막의 부지깽이 손도 빌린다는 속담도 나오는 것이지요. 새벽부터 깜깜할 때까지 허리 한 번 펼 여가 없이 부지런히 뛰어 다녀도 일은 끝나지 않는 때가 농번기입니다. 요즘 말입니다.

여성농민에게 농번기는 어떨까요? 농사일만으로도 벅찬데 거기다가 하루 세끼 밥상은 꼬박꼬박 차려야 하고, 논밭에서 진흙 범벅이 된 빨랫감은 수돗가에 쌓이고, 아이들 통학이며 뒷바라지도 해야 하고, 그 와중에도 어른들 생신이며 제사는 어김없이 다가오고….

어찌됐든지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농사일 하면서 틈틈이 그러나 제 때 제대로! 누구가요? 바로 우리 여성농민들이요. 그러니 얼굴이 햇볕에 탔는지 손톱에 때가 끼었는지 그런 걸 돌아볼 여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거울과 화장품대에 먼지가 뽀얗게 쌓이는 때가 농번기입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이런 농번기가 너무 벅차 달아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한 발자국도 더 뗄 기운 없이 어둑어둑 할 때까지 일 하고 돌아왔는데 집안은 발 디딜 틈 없이 어지럽고, 땀에 절은 몸은 씻을 사이도 없이 부엌으로 뛰어가 늦은 저녁상을 차려야 했지요. 내 배도 고프지만 그건 나중 문제로 미뤄야 하고 우선 어른 잡수실 반찬 한 가지라도 더 장만해야 했고 그건 온전히 내 몫, 우리 여성농민들의 몫이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도 삶은 쳇바퀴처럼 제자리걸음인 것 같은 절망감도 그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농사일이 대부분 기계화가 돼서 식구들끼리 합니다. 너도나도 농사거리가 많아지다 보니 이웃에게 도와 달라고 하지도 못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논농사 못자리 등은 네 댓집이 같이 하게 되는데 이때가 되면 누가 밥을 하느냐? 가 문제입니다. 여남은 명이 넘는 사람이어도 보통 한 사람만 식사준비 하면 되는데 지원자가 나서지 않습니다. “누가 밥할까?”“밥 할래? 일 할래?”

당연히 일하는 쪽이지요. 일은 땡볕에서 흙먼지 뒤집어 써 가며 해야 하고 밥은 집안 그늘에서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일하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합니다. 여러 사람 입맛에 맞춰 요리하는 것도 자신 없고, 반찬꺼리도 시원찮으니 마음도 불편하고, 밖에서 일하는 것 보다 혼자서 더 부엌에서 동동거렸는데도 일하는 사람들을 부엌에서 맞이하면 왠지 일 안하고 논 사람 마냥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힘들지?” “덥지?” 부채를 갖다 주고 선풍기를 틀어주는 쪽 보다는 차라리 그런 대우를 받는 쪽이고 싶은 것이지요.

아직 나에게도, 우리 스스로에게도 밥상을 차리는 여성들의 노동, 가족과 이웃을 돌보는 여성들의 노동이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노동으로 다가오지 못 하고 있는가 봅니다. “밥은 밥솥이 빨래는 세탁기가 하는데 그 까짓것 할 게 뭐 있냐?”는 남성들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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