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드미 장꾼에서 친환경농사꾼으로

이 사람 ㅣ 충북 청주 친환경농민 신창우씨

  • 입력 2017.05.28 07:04
  • 수정 2017.05.28 13:26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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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충청북도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 마을. 큰길에서 산속으로 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왔다. 길이 끝나는 곳에 아담하게 사당이 자리를 잡고 있고 주차장을 겸한 마당은 꽤 넓었다. 옆에는 옹기종기 농가가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이곳이 ‘고드미 마을’이다.

마당 한쪽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고드미 마을의 유래가 적혀 있다. ‘조선 광해군 때 신요라는 분이 곧은(바른) 말로 상소하여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 이곳으로 들어와 숨어 살았다. 인조가 반정을 하여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마을을 곧으미, 고디미, 고드미 또는 귀래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신요라는 곧은 선비가 벼슬을 마다하고 숨어 살아서 고드미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고드미 마을은 역사학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 들어와 처음으로 마주친 사당이 바로 단재선생의 사당이었다. 단재선생이 어린 시절부터 성균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란 마을로 1936년 2월에 만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신 후 그 유해를 고향인 이곳에 안장했다. 이곳엔 현재 단재 선생의 묘소와 사당 기념관이 있다.

곧은 선비가 숨어 살았다는 마을, 단재 신채호 선생의 고향마을로 자랑스러운 곳이지만 한편으론 오랫동안 이곳은 깊은 산골 마을로 다랑이 논을 붙이고 나무장사로 연명하며 살아가던 가난한 농민들의 마을이었다. ‘고드미 장꾼’이라면 근방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나무장사를 부르는 말이었다고 한다. 고드미 사람들은 1970년대 초까지 뒷산에서 나무를 해서 인근 미원장에 지게로 지어다 팔면서 고단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차로 다니니까 깊고 먼 느낌이 덜하지만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꽤나 깊은 산골마을 임이 분명하다.

가난의 대명사였던 ‘고드미 장꾼’에서 삶의 기반을 다진 담배농사로, 그리고 이제는 친환경농업을 지키는 농민으로 삶을 일구고 있는 신창우씨가 지난 23일 충북 청주시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 마을의 자택 앞에서 밝게 웃고 있다.

`고드미 장꾼'으로 유명했던 가난하고 깊은 산골마을

광해군 때 신요 선생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단재 신채호 선생까지 이곳은 최근까지 고령 신씨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마을을 떠나서 고령 신씨가 몇 가구 남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 ‘이 사람’의 주인공은 이 마을 토박이이자 고령 신씨의 후손인 농민 신창우씨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자 마을 쪽에서 신씨가 걸어 나왔다. “이 산속 마을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는 인사로 기자를 맞아 준다.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 첫 집 울타리 담벼락에는 알록달록 벽화가 시선을 끈다. 벽화에는 ‘문화 이모작’이라는 글씨와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 속에 앞서 걸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도 보였다. 기자가 이 그림의 주인공이 맞냐고 물으니 본인이 맞다면서 그림 속 인물의 이마의 점과 똑같은 점을 보여줬다. 마을 벽화 속에 등장하는 신씨를 보니 이 마을을 대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이 동네 애들은 전부 9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갔어요. 학교가 멀어서 좀 더 커서 가야 한다고. 아랫동네 애들은 8살에 입학했지.”

학교가 멀어서 한해 늦게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이 동네에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중학교에 보낸다고 아버지께서 도장도 새겨 놓으셨건만, 졸업 무렵 아버지가 덜컥 병환이 와서 중학교 진학은 좌절되고 말았다.

“땅이라고는 논 한마지기 하고 비탈밭 800평이 전부였어요. 1마지기 논은 15다랑이나 되었고, 밭에는 보리, 콩 팥 이런 거나 심었어요. 그때 우리 형제가 5남매였는데,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까지 여덟 식구가 먹고 살아야 해서.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고, 남의 송아지 키워 주면서 살았어요.”

산골마을인 탓에 농지는 적고 가구 수는 많아서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나무장사로 생계를 꾸려갔다고 한다. 신씨 역시 나무장사로 가족을 부양하며 살아갔다.

“어려서부터 나무장사를 다녔어요. 어리다보니 힘이 약해서 자주 쉬어야 하니까 남보다 아침 일찍 나무를 팔러 나갔어요. 다른 사람들 새벽 4시에 나가면 나는 3시에 출발했죠. 나무 두 지게 팔러 가려면 한 지게를 저만큼 가져다 놓고 다시 돌아와서 다른 지게를 그 앞에 가져 놓기를 반복하면서 인근의 미원까지 가서 팔고 왔지요.”

4km 거리를 지게 두 개를 교대로 옮겨가며 나무를 져다가 팔았다는 얘기다. 고드미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무 장사를 하며 식구들을 먹이고 생활을 이어갔다. 가까이는 미원에 멀리는 청주 육거리시장까지 지게로 나무를 져서 파는 일은 일상이었다.

아침에 나무장에 도착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은 막걸리 한잔과 안주로 내주는 공짜 국물이 전부였다고 한다. 막걸리 한잔 시켜 놓고 국물을 재차 달라고 하여 배를 채우다보니 ‘고드미 장꾼’은 가난한 나무장사의 상징처럼 청주 인근까지 소문이 났다.

신씨 역시 ‘고드미 장꾼’이라 불리며 억척스레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때는 모두가 어려웠어요. 있는 사람도 죽을 쒀서 먹고 살았지. 아침밥, 저녁죽 먹는 게 다반사였죠. 저녁죽은 둘이 먹는다는 말 들어나 봤을까. 죽이라고 해도 물이 많아서 죽 그릇에 먹는 사람이 비춘다고….”

그렇게 살다가 26세에 청주로 나갔다. “청주에 나가서 공병상회에서 일을 했는데 청주 생활이 농사짓는 거 보다 좀 나았지. 그런데 딱 한 해 있다가 들어왔어요. 결혼을 하게 돼서. 다시 고향에 들어와서 결혼을 했죠. 1970년대가 되니까 연탄을 때는 집이 늘어나더라고. 당연히 나무장사도 시들해져서 남의 땅을 얻어서 담배농사를 시작했어요. 담배농사가 돈이 좀 됐지. 그러다 1996년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허리를 다쳐 두 달간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서 담배농사도 접었어요.”

20여년 담배농사는 ‘장꾼’을 벗어나게 했을 뿐 아니라 신씨에게 삶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됐다. 비탈밭 800평, 산골 다랑이 논 한마지기에서 시작해서 평지에 밭 1,600여 평과 논 800여 평 그리고 번듯한 ‘내 집’까지 마련하게 됐기 때문이다.

삶의 기반 다진 담배농사
삶에 변화를 준 친환경농사

담배농사를 그만 두면서 시작한 게 친환경농사다. 농사가 바뀌니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이웃에서 2~3년 전부터 친환경농사를 짓고 있는 조관호씨라는 젊은이의 권유로 몇몇이 모여 고드미 친환경공동체를 만들어 친환경농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97년 무렵 우연히 친환경농사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논 한 뙈기에 오리를 넣으면서 점차 늘려갔어요. 그래서 2000년경에 유기농인증을 받았지요.” 친환경농사는 마을 사람들을 한데 묶어나가는 계기가 되었고 이들이 모여 녹색체험 마을도 만들어 나갔다.

“2002년까지 이장을 했었는데 2002년 늦가을에 녹색마을 신청을 해보니 군청에서도 녹색체험마을에 대해 어둡더라구요. 어려움이 많았는데 우여곡절 끝에 그해 말에 선정됐어요. 그 당시 16명이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100만원씩 출자해서 땅 600평을 사고 2003년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황토 건물 3채를 짓고 체험마을을 운영했죠.”

고드미 마을 입구 담벼락에 그려진 본인의 모습을 보며 웃는 신씨.

녹색농촌체험마을 사업은 2001년 당시 농림부에서 주5일 근무제 확산 등으로 늘어나고 있는 도시민의 농촌 여가생활 수요를 농가소득으로 연결시키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그린 투어리즘’ 사업의 일환이다. 첫해에는 20개 마을이 선정됐고 고드미 마을이 선정된 2002년에는 27개 마을이 계보를 이었다.

“그 당시 전국적으로 잘하는 체험마을로 화천의 토구미 마을, 단양 한드미 마을, 이천 부래미 마을 그리고 여기 고드미 마을까지 있었는데, 우연히 마을 이름 끝이 ‘미’자가 들어가서 홍보효과도 있었어요. 체험마을 만들고 한 10년은 아주 잘 됐죠. 처음에는 청주 시내의 생협, YWCA 같은데서 많이 오고, 우리가 친환경 농산물 직거래 하러 가서 알리고 해서 입소문도 퍼지고. 여기는 단재 선생님의 고향이고 기념관이 있어서 단재 선생님 관련한 행사도 많이 열리는데 연계한 프로그램도 운영해서 호응이 제법 좋았어요.”

그러나 10년이 지나고 정부 지원이 중단되면서 녹색체험마을은 활기를 잃어갔다. 결정적으로는 사무장에 대한 인건비 지원이 중단 되면서 체험마을을 운영할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동안 체험마을이 잘 운영 됐다지만 인건비를 충당할 만큼의 수익이 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초창기부터 함께 일했던 청주대학교 명예교수인 박정기 교수님이 대표를 맞아 이끌어 가고 있어요. 지금이 가장 어려운 때 인 거 같아요. 이 고비를 넘기면 좋아 질 거라고 생각해요.” 신씨는 녹색체험마을에 대한 기대를 놓지 않고 있다.

고드미 마을의 현재는 우리 농정의 현실과 농촌의 상황이 투영된 일반적 모습이다. 일관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은 농정이 정부 정책을 따라 사업을 시작한 농민들에게 결국 좌절을 안기는 결말로 통일된다. 더불어 농촌경제가 나날이 피폐해지면서 그나마 농촌을 이끌어가야 하는 젊은 농민들이 마을일을 맡아서 할 여력이 없다.

고드미 마을에서 친환경농업을 선도하고 녹색체험마을을 함께 했던 조관호씨는 “농사지으며 살아가려니까 점점 농사 규모를 키워야 하고 그러다보니 빚도 늘어 마을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농번기에는 농사일에 바쁘고 농한기에는 시내에 나가 돈을 벌어야 애들 학비라도 보탤 수 있거든요.” 비단 고드미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다. 답답한 농정의 현실이고 농촌의 속내다.

그래도 신씨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무던한 세월을 헤쳐 살아온 힘에서 비롯된 도전의식이랄까.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떠나고 친환경농사가 절정이었을 때 마을사람 대부분이 함께 짓던 농사를 지금은 겨우 두세 명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남은 이들과 함께 꾸준히 마을을 지키고, 농사를 지키고 친환경농업을 계획하고 있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에 비하면 성공한 편입니다. 힘이 있는 한 농사를 놓을 수 없죠.”

가난의 상징 ‘고드미 장꾼’ 출신 신씨가 지게 대신 담배농사와 친환경농사로 딛고 선 땅에 다시 사람이 모이는 날을 손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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