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경상도 농촌의 대선날 풍경

  • 입력 2017.05.21 11:01
  • 수정 2017.05.21 11:06
  • 기자명 이영수(경북 영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수(경북 영천)]

이영수(경북 영천)

19대 대통령선거일, 눈을 뜨니 비가 내려 차분히 마음을 다듬고 있는데 아침부터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일면식도 없는 시청 공무원이 투표독려 마을방송을 부탁했다. 면사무소에서도 수시로 문자를 보내 우리 관내 투표율이 낮다며 투표독려를 해 달라고 야단이다. 평소 행정도 투표독려의 반의 반이라도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경상도 농촌지역의 투표율이 높아지면 어느 정당이 유리할지 잘 알기에 투표독려가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나름 공정한 이장이 돼야 한다는 사명감에 마을 방송을 했다.

“주민 여러분, 오늘은 19대 대통령선거일입니다. 투표는 민주주의의 꽃이자 우리 국민들이 가진 가장 강력한 권력입니다. 바쁘시더라도 마음을 내어 투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몇 차례 마을방송을 하고 투표소로 갔다. 삼삼오오 어르신들을 태운 차가 속속 도착했고, 투표장은 간혹 우스갯소리하는 분들이 있었으나 긴장감이 돌았다. 이번에도 야당 참관인은 구하지 못했는지 자유한국당 참관인만 당당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투표 칸이 작다길래 긴장하며 도장을 찍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노인 내외분이 우산을 쓰고 투표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순간 혼란스러웠다. 태워드려야 옳다는 도리와 분명 돼지발정제로 유명한 사람을 찍을거라는 계산을 하는 사이 매정하게 두 분을 지나쳤다. 얼마 못 가 도리를 해야 한다는 알량한 양심에 차를 휙 돌려 어르신들을 태우고 투표소로 다시 돌아갔다. 갈 때도 모시려고 투표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투표소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궁금해 들여다보니 내가 모셔온 어르신과 선관위 직원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어르신이 투표지를 접지 않고 들고 있었다. 처음엔 ‘안 접고 투표함에 넣는 것 정도는 좀 봐 주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르신이 2번 찍었다는 걸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스레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소란은 이내 정리됐다. 다시 차로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왜 그러셨냐고 여쭤보니 ‘갱상도에서 밀어야제 그라고 보여줘야 사람들이 믿제’라고 한다. 내외분을 집 앞까지 모셔드리는 걸로 도리는 다 했다고 위로했다.

 

비도 내리고 해서 저녁에 형님 몇 분과 옻닭 집에서 소주 한 잔 하며 개표방송을 봤다. 출구조사도 나오고 술도 거해져 경상도 보리 문디들끼리 평소 못한 정치얘기 실컷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술이 부족해 사장님을 몇 번 불러도 대답이 없어 가게 옆 살림집까지 찾아가니 담배연기 자욱한 거실에서 개표방송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은 미안하다며 시원한 소주에 반찬 몇 가지까지 더 챙겨줬다. 같이 간 일행이 “문재인이가 돼가 우짜능교?” 넌지시 건네는 말에 한숨을 푹 쉬며 “우야능교 인자 빨갱이 나라에서 살아야죠”라고 한다. 우린 눈만 마주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귀농 초기 참 좋은 형님이 있어 술 한 잔 먹고 이런저런 속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내 말을 한참 듣더니 “자네 말은 참 옳네만 강한 것이 이기고 이기는 것이 옳은 것이여. 난 옳은 편에 설거여”라던 그 형님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경상도에서 이번에 2번을 찍는다는 건 옳고 그름을 넘어 힘있는 세력과 한 편이 되겠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으리라. 경상도에서 그 편은 박정희 이후 50여년 간 한 번도 안 변했고, 그 편이 된다는 의미는 살면서 뼈저리게 느꼈으리라. 그래서 낮에 만난 어르신도 나도 한편이라 항변하셨으리라. 성주군민들의 지지율을 보고 말이 많지만 평생 힘센 편에 있다가 주류세력들에게 왕따당하는 힘없는 편으로 돌아선다는 것의 의미를 경상도에서 사는 나는 절절히 느낀다. 그래서 난 고난의 길을 기꺼이 선택한 분들이 늘어난 것에 희망을 보고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문다.

언제쯤 경상도 투표소에서 야당 참관인을 쉽게 볼 수 있을까? 언제쯤 경상도 노인들이 빨간색 옷을 입은 사람처럼 다른 색 옷을 입은 사람과도 반갑게 악수 할 수 있을까? 언제쯤 경상도 농민들에게 농민을 위해 최루탄 터트린 사람에게 의리를 지키자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언제를 위해 난 오늘도 기꺼이 절치부심 와신상담한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