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 고래잡이 - ②] 조선 포경(捕鯨) 주식회사

  • 입력 2017.05.14 21:53
  • 수정 2017.05.14 22:02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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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1945년 8월 하순, 온 나라가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기쁨에 들떠 있었다. 다시 만져본 흙냄새도 향기롭고, 바닷물도 춤을 췄다. 그런데 동해안 장생포 부둣가에 둘러앉은 고래잡이 선원들의 입에서는 장탄식이 쏟아졌다.

“남들은 일본 놈들 치하에서 해방됐다고 좋아갖고 태극기 들고 만세 부르고 야단인데, 우리 신세는 와 이래 됐노.”

“그렇다고 고래 잡든 사람이 꽁치나 새우 잡어묵고 살 수는 없는 일이고….”

“회사 댕기든 사람이 자기가 싫어서 그만둘 때도 뭐라카노, 그 퇴직금이라카는 것을 주는 법인데, 땡전 한 푼 안 주고 도망가버렸으니 우리는 우째야 좋겄노?”

“퇴직금을 받아주라고 정부에다가 항의를 해야 되는 것 아녀?”

“정부가 있어야 찾아가서 항의를 하든지 떼를 쓰든지 할 거 아이가.”

“이럴 것이 아니고, 우리가 대표를 뽑아갖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장한테 퇴직금을 내놓으라 하입시더. 퇴직금을 몬 주겠으면 배라도 몇 척 달라고 해서 타고 와야 된다카이.”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일본수산주식회사> 소속 포경선에서 고래잡이를 하다가, 일제가 패망하여 일본인 사주가 포경선들을 모두 끌고 본국으로 돌아가 버리자,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한국인 선원들이다. 그 일본 회사는 경상도의 장생포와 전라도의 흑산도에 고래잡이 기지를 두고 포경사업을 해왔는데, 포경선에 탔던 선원들과 고래 해체장에서 일했던 양쪽의 한국인 종사자들이 줄잡아 350명에 이르렀다. 배운 기술이라고는 고래 잡는 요령과, 잡아 올린 고래를 해체하는 재주밖에 없는 그들로서는, 실로 앞길이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종업원 대표 몇 사람을 뽑아서 호기롭게 일본으로 보냈다. 하지만 퇴직금을 받아오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아주 빈손은 아니었다. 두 척의 고래잡이용 목선을 통통거리며 장생포항에 나타난 것이다.

목선은 철선에 비해 크기도 작고 속도도 느릴 뿐 아니라, 고래를 잡는 방법 역시 원시적이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수산주식회사>에서는 주로 철선으로 고래를 잡았는데, 그 철선들을 태평양전쟁에 징발 당할 경우에 대비해서 10여 척의 목선을 예비로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장생포와 흑산도의 선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난상토론을 벌였다.

“변변한 전마선 한 척 없어서 아쉬웠든 판에, 목선 두 척도 감지덕지 아니라고. 뭘 타고 나가든 고래만 잡을 수 있으면 됐제.”

“배는 달랑 두 척 뿐인데, 주인은 350명이나 되니 이 배 운영을 우째 했으면 좋겄노?”

“회사를 맹글어서 공동으로 조업을 하드라고. 회사 이름도 좋은 놈으로 하나 짓고.”

“조선수산…아니, 조선포경주식회사라고 하면 안 되겠나?”

“그거이 좋겄구먼. 그라믄 350명 전부가 주식회사의 주주가 된다 이 말이네.”

이렇게 해서, 해방 후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포경회사가 탄생한 것이다. 4월과 5월은 흑산도 쪽으로 가야 고래가 잡히고 6, 7, 8월은 장생포가 적기였기 때문에 그들은 두 척의 배를 타고 흑산도와 장생포를 오가면서 고래를 잡았다.

“350명 중 100명은 해체작업 하는 사람이고 250명은 배 탈 사람이야. 문제는, 포경선 한 척의 정원이 고작 12명인데 누구를 먼저 태울 것이냐, 해서…옥신각신 골치가 아팠다니까.”

장생포 고래잡이의 산 역사로 자타가 공인하는 김해진 노인의 회고다. 설상가상으로 두 척의 포경선을 둘러싸고 장생포파와 흑산도파 사이에 격렬한 분쟁까지 발생했다.

결국 주인이 350명이나 되어서 바람 잘 날 없던 그 회사는 망해버렸다. 그런데 <조선포경주식회사>가 망해버린 바로 그 시점이, 우리나라 포경산업이 본격적으로 뻗어 나아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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