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수탉의 비애

  • 입력 2017.04.28 14:37
  • 수정 2017.04.28 14:40
  • 기자명 최용혁(충남 서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용혁(충남 서천)]

최용혁(충남 서천)

춥고 어지러운 세상을 이제 다 건너왔다. 봄날, 닭들은 여느 때보다 활기차고 바쁘다. 축적된 겨울을 풀어도 쓰고 느긋한 여름을 당겨도 써 가며 하루를 꽉 채운다. 가축치고는 제법 놀고 있는 닭들을 보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잖은 체하며 처음으로 묻는 질문은, 한 마리의 수탉이 몇 마리의 암탉과 짝을 이루냐는 것이다. 유정란을 생산할 때의 적당한 비율은 1대 15 안팎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경제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이며, 그러기 위해 지켜야 하는 닭장 안의 평화를 유지하는 비율이다. 알은 암탉이 낳지만 수탉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문제를 일으킨다. 있긴 있어야 하되 눈치껏 적당히 있어야 한다.

 

닭들에게는 자연스러운 환경일 뿐이지만, 1대 15라는 비율에서 사람들은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읽기도 한다. 지금보다 열다섯 배의 돈과 열다섯 배의 집과 열다섯 배의 쾌락을 누리는 방법은 없을까? 수탉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려서라도 묻고 싶어 한다.

‘젊어서 한 때 1부 1처제와 맞서 싸워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자유를 좀 더 본질적으로 실현해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피투성이 몸으로 돌아와 복기해보면 ‘반 1부1처제 투쟁’의 대의는 사라지고 열다섯 배의 돈과 열다섯 배의 집과 열다섯 배의 쾌락에 대한 욕망이 나를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부끄러운 고백을 들려주며 답을 구한다.

 

하지만 수탉의 입장에서는 단순한 관찰자가 알기 어려운 다른 진실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명의 탄생이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지니 암수 비율 역시 50대 50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나머지 수평아리들은 다 어디 있냐는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닭들의 시뻘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생각해야 한다. 어디로 갔을까? 알을 낳지도 못하고 육계처럼 빨리 살이 오르지도 않아 식용으로 팔기도 힘든 산란계 수컷들은 대부분 태어나자마자 사라진다. 분쇄기에 갈리는 방식으로 사료가 된다. 이런 수많은 죽음이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생명체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살생이라 불리지도 못하는 살‘처분’이 되고 ‘적자’가 아니라 도태되는 것이다.

열다섯 배의 절실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나 수탉의 대답은 ‘네가 그 죽음을 아느냐?’는 반문일 것이 뻔하다. 오히려 생명의 본질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 90%의 수평아리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다시 무릎 펴고 고개도 빳빳이 들고 다른 방법을 찾기 바란다. 일단, 용감하고 늠름해서가 아니라 그저 운이 좋아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수탉과 나에게 서로 연민을 가지기 바란다. 서로 위로하기 바란다. 그 날갯죽지와 어깨동무할 수 있을까? 그것들의 꽉 차고 부산한 봄이 눈도 뜨지 못하고 사라진 어린 병아리들을 위한 열다섯 배의 어떤 노력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함께 묵상해주길 바란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