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당에서 농민회까지

이 사람 ㅣ 제주 농민 이태신씨

  • 입력 2017.04.21 23:09
  • 수정 2017.04.21 23:39
  • 기자명 심증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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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정신문 심증식 편집국장]

“메밀을 심어야 하는데 비가 자주 와서 파종 준비를 할 수가 없어. 땅이 질퍽하니 갈아 놓으면 덩어리가 지고 딱딱해져서, 아무래도 올해 봄 메밀 파종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제주 농민 이태신씨는 메밀을 2만평 정도 심을 계획이었는데 잦은 비로 망설이고 있었다. 메밀의 주산지가 제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주야말로 메밀 주산지야. 강원도 평창이나 봉평을 주산지로 알고 있지만 그건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배경으로 알려져서 그렇지 제주가 전국에서 메밀이 제일 많이 나.”

죽음의 문턱에서 시작한 농사와 농민회 활동을 통해 정의롭게 살고 권익을 지키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는 이태신씨. 마늘농사를 짓던 해 농협이 계약금을 낮춰 수매한다는 말에 발끈해 끝내 계약금을 받아낸 이후로 마늘농사는 접었지만 최근 제주 마늘값이 하락할 조짐에 지인의 마늘밭을 둘러보다가 걱정을 보탰다.

전국 메밀 생산량의 절반 가까운 48%가 제주에서 생산되고 강원도는 14%에 불과하다. 메밀은 고려시대 몽고에 의해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한다. 제주 토속신화에도 ‘자청비’가 하늘에서 편한 삶을 포기하고 오곡의 씨앗을 받아 땅에 내려와 씨앗을 파종하고 보니 종자 한 가지가 부족했는데, 그게 바로 메밀이었다. 서둘러 다시 하늘로 가서 메밀 씨앗을 가져오다보니 파종 시기는 늦었는데도 수확 시기는 다른 농작물과 비슷하게 됐다는 얘기가 설화로 남아있다. 제주에서 메밀은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고 실질적인 면에서도 가치가 높은 상징적인 곡식이다.

“메밀은 자청비 전설처럼 제주의 상징이야. 그래서 메밀을 잘 활용해야 해. 여기저기 유채꽃을 심어 놓고 있는데 시들해졌어. 메밀을 더 많이 심어서 제주의 상징으로 만들어야 해. 그런 뜻에서 메밀을 많이 심으려 했는데 날씨가 가로막네.”

지역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메밀농사에 대한 의미를 강조하다가 봄 파종을 못하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이씨가 메밀을 심으려고 하는 곳은 제주도 안덕면 화순리에 있는 2만5,000평의 중산간 지역이다. 어느 회사 소유의 땅으로 이씨가 관리 하면서 약간의 관리비를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 메밀 심고 잡목들 베어내고 유실수도 심고, 자연인처럼 사는 게 내 꿈이야. 땅주인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라고 했어. 대신 나중에 여기 정리할 때 과수나무 소유권 주장은 없는 조건으로.” 올해 66세의 이태신씨는 농촌에서는 아직 한참 일할 청년이나 다름없지만 삶을 달관한 듯 이야기를 풀어낸다.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터득한 삶의 자세인 듯했다.

“어릴 때는 일도 참 많이 했어. 겨울이 되면 군불 땔감으로 소똥 말똥을 주워서 말렸지. 한겨울 나려면 40~50가마를 말려놔야 든든했지. 그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했어. 소똥 말똥은 오래 타서 땔감으로 아주 좋아.” 생소하지만 제주에서는 소똥과 말똥을 바짝 말려 연료로 사용했다.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 이씨 역시 어려서부터 땔감 장만 뿐 아니라 농사일에 손을 보태면서 자랐다. 공부도 잘 하는 편이었다. 그 당시 제주의 최고 명문고라 꼽히던 제주일고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하지만 주말이나 방학이면 집에 와서 농사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청년 이태신의 삶의 방향도 달라졌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서울행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69년이었어. 2월 12일 졸업하고 13일 서울로 올라갔지.”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청년의 서울생활은 고단하고 비참했다. “처음 발 디딘 곳이 중국집이었어. 서울 지리를 모르니 배달일은 못하고 설거지를 했지. 아이고, 그때는 세제도 없고 위생관념도 없었어. 뜨거운 물에 적당히 닦아서 그릇을 내놓는 게 일이야. 중국집에 그릇이 많지 않아서 바로바로 씻어서 내놔야 했어. 설거지 속도가 늦다고 주방장이 타박을 하다 큰 국자로 머리를 때려서 피가 줄줄 나오는 거야. 그 흉터가 지금도 있어. 화가 나서 주방장한테 그릇을 내던져 버렸지. 그 일로 경찰서에 끌려가서 벌금을 물기도 했어.”

서울생활은 고됐다. 만만한 곳이 없었다. 인쇄소, 잡화점, 청과상회 등을 전전하며 제주 청년은 서울 생활을 이어갔다. 간혹 대우가 괜찮은 곳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돈을 벌만하면 쫓겨나야 했다. 서울생활 4년째인 22살 무렵, 아내를 만났다. 서울생활은 3년 더 이어가다 다시 제주행을 택했다.

“제주에 내려올 때는 나 혼자 내려왔어. 화순리사무소 사무장을 하라고 해서 그 일을 맡았지.” 리 사무장으로 제2의 고향생활이 시작됐다. 가정도 꾸렸으니 좀 더 안정된 생활을 하려고 공무원시험도 봤다. “공무원 시험 1차에 합격하고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관이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이 공무원하려고 하냐며 면박을 주는 거야. 그래서 싸우고 나왔지.” 군 미필의 ‘결격’ 사유로 공무원이 돼 보려던 꿈은 접고 말았다.

타향보다 고향이라고, 생활은 차츰 안정됐다. 동네 청년회 부장 직책까지 얻으면서 일처리를 공평하게 한다는 평이 돌자 자연스레 여러 개의 직함이 생기고 또 생겼다. 재밌는 일은 군대도 안 갔다 온 이씨가 예비군 리대장도 하게 됐다는 점이다.

“제주 화순 화력발전소 지을 때인데, 인부가 800명인데 직장예비군이 없었어. 새로 만든 직장예비군에 동창 오빠가 해병대 대위 예편하고 예비군 중대장으로 왔는데 통제가 돼야 말이지. 내가 덩치도 있고 하니까 나한테 리대장을 하라고 하더라고.” 이태신씨는 지역에서 지명도가 높아졌다.

그런데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삼청교육대에 갈 처지가 됐다. “화순에 순화교육 대상자 10명의 명단이 내려 왔는데 내 이름이 세 번째에 들어 있었어. 당구 치다 싸운 전과가 있어서. 검찰에 갔는데 지금 순화교육에 가면 큰일 난다고, 마침 담당검사가 집사람과 동향인 충남 홍성 사람이라 방법을 알려줬어. 여당 쪽에서 활동하라고. 사회정회위원회 사무국장을 하게 된 것은 순화교육을 받지 않는 방편이었어.” 이때부터 이태신씨는 여권에서 활동하게 됐다. 연합청년회 총무도 하고 JC 안덕면 회장, 민정당 제주도당 부위원장까지 하며 승승장구했다. 아내는 식품점을 해서 돈도 제법 벌었다. “그때만 해도 제주에서는 친절이라는 게 없었어. 그런데 집사람은 나랑 다퉈서 기분이 상해 있다가도 손님이 오면 웃으면서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했지. 그래서 안덕면에서 가장 손님이 많았어.”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돈이 모여 다른 사업을 하면서 까먹기 시작했다. 가세가 어려워지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부부 모두 수술을 하느라 병원을 들락거렸고, 이씨는 당뇨성 망막파열로 시력이 나빠진 데다 2년 후에는 관상동맥협착증 수술까지 받았다.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이후에 시작한 것이 농사다.

농민회원들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서 시작한 농사

“이웃에 사는 김창수 이장이 형님은 돌아다니면서 관찰만 하고 리사무소 일도 하라며 적극 농사일을 권했어.”

“농사를 시작한 건 2011년인데, 콩 농사를 하다 망했어. 다음해에는 소득이 높은 것 한다고 양파를 심었는데 또 망했지. 이듬해는 감자를 심었는데 막 캘 준비를 했는데 비가 오는 거야. 줄기가 잘린 상태라 수관을 타고 물이 들어가서 감자가 모두 썩어 버렸어.” 느지막이 시작한 농사는 순탄치 않았다. 농사를 지을수록 빚이 쌓였다. “두 해 농사 망쳐서 4,000만원 빚이 생겼어. 올해 농사 잘 해서 갚으려 했는데 태풍으로 콩이 쓰러지는 바람에….” 이씨는 농사를 2 ~ 3년 짓고 나서야 농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으로 보는 것하고 실제 농사는 차이가 컸어. 정보 공유할 길도 있어야 하고, 권익을 주장하는 통로도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농민회에 가입하게 됐지. 지금까지 보수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완전히 다른 길을 간 셈이야.” 농민회는 오래 전에 작은 인연이 있었다. 안덕JC 회장을 하던 시절 안덕농민회 창립총회를 하려했으나 면사무소가 장소를 빌려주지 않아 애를 먹던 차에 이씨가 자청해서 JC 사무실을 빌려 준 적이 있다.

이씨는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생각과 삶이 많이 달라졌노라고 밝혔다. 내 몫을 빼앗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적극적으로 자기 권리를 주장하게 됐다는 것.

“2014년 농협하고 마늘을 2,300원에 계약했는데 마늘 값이 떨어지니까 농협에서 1,700원에 수매하겠다고 했어. 그래서 농민 14명을 조직해서 조합장하고 싸웠지. 12월 31일까지 계약이행하지 않으면 고발하겠다, 2015년 조합장 선거에 낙선 운동하겠다고 했지. 결국 농협이 상품만 2,300원에 수매해 갔어.” 처음으로 자신의 이익, 농민들의 이익을 위해 나선 싸움에서 작은 성과를 거뒀다.

올해 제주 마늘 농민들은 또다시 근심이 가득하다. 마늘 값 폭락이 예상돼 포전거래조차 끊겼다고 한다. “작년에 마늘 값이 좀 좋았다고 정부에서 마구 수입해 온 탓 아니겠나” 혀를 찼다. 이씨는 2014년 농협과 마늘 싸움을 한 후부터 마늘농사는 짓지 않지만, 그 심경이 남일 같지 않다.

“어떤 게 정의인지는 모르지만 비분강개가 있어야 해. 나쁜 일에 화낼 줄 알고 손들 줄도 알아야 하고, 그런 면에서 농민회는 어용 단체와 확실히 다르더라고. 국수 사주고 밥 사주는 단체하고는 달라. 그래서 농민회 활동이라는 것이 고난의 연속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

농민회 활동경력은 길지 않지만 일상의 변화는 뚜렷하다. 서울에서 농민대회가 있으면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2015년 11월 14일 백남기 농민 사건이 일어 날 당시에도 그 자리에 있었다.

“백남기 형님 쓰러지실 때, 그 때 내가 같이 죽었어야 했는데.” 백남기 농민 이야기를 하면서 분노를 금치 못했다. 농촌현실을 극복하려면 “사람이 죽어야 눈이나 꿈쩍 할까, 내가 먼저 죽으면 남은 사람들이 싸우고 그래도 안 되면 또 한 사람이 죽고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극단론을 펴는 것도 한걸음조차 내디딜 수 없는 절박한 현실과 그에 대한 답답함이 있어서다.

관변단체에서 활동하다 80년대 독재정권의 상징인 민정당 고위간부까지 맡았던 이태신씨, 농민회 활동 6년 만에 그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농사를 지으며 제주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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