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래 고약-① 고약한 종기엔 고약이 특효였다!  

  • 입력 2017.03.31 13:55
  • 수정 2017.03.31 14:2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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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어린 시절, 나는 왼쪽 다리에 부스럼을 달고 살았다.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등걸에 찔려서 정강이를 다친 것이 시초였다. 피를 꽤 흘렸으나, 그 시절 시골 아이들이 평소에 하던 대로 풀도 찧어 바르고 흙도 바르고 하여 일단 지혈을 했다. 

  부모님에게 고해봤자 조심성 없이 촐랑거리다 다쳤다며 야단만 맞을 게 뻔한 일, 나는 피가 엉겨 붙은 그 상태로 그냥 방치했다. 시골의 사내 녀석들이야 걸핏하면 넘어지고 자빠지고 하여 여기저기 생채기가 나는 건 다반사였고, 특별히 치료를 하지 않더라도 제 스스로 딱지를 입었다가 며칠 지나면 멀쩡히 나았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찔린 상처가 깊었던 모양으로 이튿날이 되자 본격적으로 통증이 밀려왔다. 

 “아프면 아까징끼를 볼르면 돼.”

 다리를 붙들고 끙끙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동생 녀석이 장롱 서랍에서 빨간 약병을 꺼내왔다. 약솜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던 녀석은 덮고 자던 이불깃 속으로 손을 넣더니 솜 한 움큼을 뜯어냈다. 녀석은 빨간 약을 듬뿍 묻혀서는 방바닥에 흐를 정도로 넉넉하게 찍어 발랐다. 난 비명을 질렀다.

 “넌 죽었어! 이거 아까징끼 아니지?”

 그 시절 속칭 ‘빨간약’으로 통하던 상비약 중에는 ‘아까징끼’라고 불리던 머큐로크롬 외에도 옥도정기라는 약이 있었는데, 옥도정기를 발랐을 때가 몇 배가 더 쓰라렸다. 

 돌팔이 동생의 응급조치 덕분인지 통증이 가시고 그럭저럭 딱지가 굳어지는가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친 부위를 손으로 눌렀더니 부스럼딱지를 비집고 누런 고름이 흘러나왔다. 상황이 심상찮음을 깨달은 나는, 아부지보다는 아무래도 덜 혼낼 것 같은 엄니 쪽을 택해서 이실직고를 했고, 엄니가 날 들쳐 업고 뛰었다. 의원이나 약국은 읍내에나 나가야 있었지만, 시골마을마다 용하기로 소문난 무면허 의사 혹은 약사가 꼭 한 사람씩 있었다. 우리 마을은 동네우물 아랫집 사는 진철이 어버지가 그 사람이었다.   

 진철이 아버지는 일단 부스럼 딱지를 떼 낸 뒤, 두 손으로 상처부위를 눌러 고름을 짜냈다. 다음으로 기름종이 한 조각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다 유리구슬만한 검은 덩어리를 놓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짓이겨 펼쳤다. 고약이었다. 나는 처음이었지만 학교에 가면 머리나, 무릎에 종기가 나서 고약을 바르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부지가 보던 신문 광고란에서 “고약은 이명래, 이명래 고약!” 어쩌고 하는 선전 문구를 여러 번 봤다. 당시 난 ‘이명래’가 사람 이름인 줄도 몰랐으나, 고약은 우리들 세계에도 알려진 치료약이었다.

 한 번은 외갓집에 갔다가 그 마을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넘기를 하면서 이상한 노래를 부르는 걸 들었다. ‘고바우 영감이 / 고개를 넘다가 / 고개를 다쳐서 / 고약을 발랐더니 / 고대로 나았대요…’ 대충 이런 노래였다. 신기하고 재밌게 들렸지만 여자애들이 하는 고무줄놀이 노래라 ‘머시마’가 따라 부를 엄두를 낼 것은 아니었다.  

 “안 떨어지게 잘 붙이고 있다가 사흘 뒤에 다시 온나.”

 진철이 아버지가 내 정강이 상처에 고약을 붙이고는, 기름종이의 이쪽저쪽으로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러나 난 그 용한 의사 선생님의 당부를 지키지 않았다. 

 섬마을인 우리 동네에서는 해변을 따라 나 있는 길로 등하교를 했는데 여름철이면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우리 멱 감고 가자!”

 누군가 그렇게 선동을 하자 사내 녀석들은 그 해찰에 동참하겠다는 표시로 길 아래 갯돌밭으로 먼저 책보부터 내던졌다. 난 망설였다. 정강이에 고약을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멱 감고 가자!”

 내가 먼저 집에 가면 딴 짓하다 늦게 온 것이 들통 날 것이었으므로, 이웃집 종석이 녀석은 아예 나의 책보를 낚아채버렸다. 하는 수 없이 오후 내내 바닷물 속에서 첨벙거렸다. 물론 반창고로 고정하여 붙였던 고약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이후로도 내 정강이에는 여러 번 새 고약이 붙었고, 난 또 그때마다 그걸 용왕님께 바쳤다. 그 여름, 난 고약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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