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칼럼] 봄날의 꿈

  • 입력 2017.03.31 13:50
  • 수정 2017.03.31 13:56
  • 기자명 이영수(경북 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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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수(경북 영천)]

이영수(경북 영천)

귀농 10년차 봄이다.

모든 농사꾼에게 봄날이 분주하듯 내게도 봄날에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멀쩡하게 대학교육까지 시켜놓은 아들이 느닷없이 농사지으러 오겠다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아버지는 “니가 정 농사짓고 싶으면 내 안 보이는 데서 지어라” 한 마디 하시고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셨다. 무작정 농사지으러 내려왔을 때 동네 어른들은 봄을 맞아 경운기로 논갈이가 한창이었다. 나는 공부를 핑계로 그때까지 경운기라고는 몰아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은 중학교 때부터 두 발로 경운기를 몰았지만, 창피하게도 나는 결혼하고 나서도 일흔이 넘은 노부가 운전하는 경운기 뒤에 타고 다녔다. 서툰 운전에 쟁기질까지 하려니 죽을 지경이었다. 거기에다 마을 한복판에 논이 있으니, 동네 어른들의 시선은 온통 우리집 부자에게 쏠렸다. 아버지는 동네 창피하다고 집밖으로 나오지 않으셨고, 나는 물집이 잡히고 알이 배고 파김치가 됐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된다는 일념으로 닷새를 꼬박 논을 갈았다. 지금은 논갈이하는 봄이 와도 트랙터가 있어 걱정없지만 아직도 귀농 첫 해 논갈이를 잊을 수 없다.

호랑이 같던 아버지는 5년 전 미나리가 돋아나던 봄날에 돌아가셨다. 아버지 가슴에 대못을 박은 불효자는 사흘을 꼬박 울었다. 부모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 그것이 후회였고 불효였다. 생전에 아버지가 미리 말씀해 주신 자리에 하관을 하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봄 햇살이 그렇게 따사로울 수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나를 껴안아주시는 것 같아 거짓말처럼 그때부터 울음이 멈췄다.

 

과일 농사꾼의 봄날은 긴장의 연속이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는 자연스런 명제가 올해 봄에도 실현되면 얼마나 안도하고 감사한지 모른다. 제 아무리 기술을 습득하고 연구해도 봄날에 꽃을 못 피우고 결실이 안 되면 무용지물이다. 특히 살구농사를 짓는 내게 있어 봄날은 더하다. 과실나무 중에 매실과 함께 가장 일찍 꽃이 피는 살구는 그만큼 서리피해의 위험이 크다. 그래서 살구꽃이 피는 보름 정도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온도를 확인하고, 서리가 올 것 같다 싶으면 온 밭을 돌아다니며 미리 준비해 둔 등겨 더미에 불을 지피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애간장을 태운다. 한 해는 예쁘게 핀 살구꽃에 된서리가 내려 전멸한 적이 있다.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관수도 하고 비싼 자재로 엽면시비도 하고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그 길로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일년 농사를 망친 암담함에 펑펑 울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고, 꽃눈이 봉긋한 걸 보니 며칠 내로 살구꽃이 피고 뒤를 이어 복숭아 사과 꽃이 필 것 같다. 겨우내 추위와 싸우며 정성들여 전정은 했지만 동해로 꽃눈은 얼어 죽지 않았는지, 올해도 과연 꽃을 피워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올해도 봄이 왔으니 꽃이 피는 자연스런 명제가 실현됐으면 좋겠다. 꽃이 활짝 피어 그야말로 봄이 봄다웠으면 좋겠다. 요새 들어 뭐 뭐 답다는 말의 의미를 자주 되묻게 된다.

생뚱맞지만 부디 봄은 봄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해양경찰은 해양경찰답고 의사는 의사답고 언론은 언론답고 경찰은 경찰답고 검찰은 검찰답고 판사는 판사답고 국민은 국민답고 대통령은 대통령답고, 나라는 나라다웠으면 좋겠다.

그게 내 봄날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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